베를린 살이20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0주 
제목: 망년(忘年)의 향기를 전하며


탁 위 노랗게 까불대는 촛불 밑에 오늘은 케이크 한 조각이 놓였다. 크리스트슈톨렌이다. „Christstollen(크리스트슈톨렌)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때 먹는 대표적인 쿠흔이다.

   한국에 떡이 있다면 독일에는 „Kuchen(쿠흔)이 있다. 쿠흔을 한국말로 번역하자니 이런저런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도 „케이크 가 가장 무난한 말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마저도 외래어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문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쿠흔은 재료나 만드는 방법은 달라도 음식의 기능면에서는 떡과 상당히 유사하다. 

   한국 문화에서 떡이 그렇듯 독일 문화에서 쿠흔은 단지 간식거리가 아니다. 의미 있는 날에 최고의 격식을 갖추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기쁨과 풍요의 상징이며 나눔의 매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료도 그 시기에 나는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듬뿍 담아서 정성스럽게 만들어낸다는 점 또한 떡과 다르지 않다.

   Stollen(슈톨렌)은 쿠흔의 한 종류로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고 꼭 크리스마스에만 먹는다고 볼 수도 없지만 그 중에서 „크리스트슈톨렌이란 종류는 딱 이맘때만 먹을 수 있다. 생일 잔치나 다른 명절 때는 쓰이지 않다가 유독 크리스마스 때 많은 가정에서 크리스트슈톨렌을 굽기 때문이다. 크리스트슈톨렌의 모습은 아기예수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 해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듯한 겉모습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리는 쿠흔이다. 

   안흥찐빵이나 천안의 호두과자처럼 크리스트슈톨렌 앞에는 항상 드레스덴이 붙는다. „슈톨렌이라고 하면 드레스덴을 떠올릴 정도이고 가정에서 구울 때도 대부분 드레스덴 지역의 전통방법을 따른다. 그 방법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만들기 하루 전에 건포도 등 말린 과일을 따뜻한 럼주에 불린다. 다음날 미지근한 우유에 누룩을 풀어 따뜻한 곳에서 잘 발효시킨 후 밀가루와 버터 설탕 소금 등을 넣고 반죽한다. 20분 정도 잘 치댄 다음 준비해놓은 과일 껍질 절임, 견과류 등을 섞는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발효과정을 거친다. 완성된 반죽은 형태를 잡아 180도에서 한 시간 가량 구워낸다. 
   과연 누구나 쉽게 만들 만한 케이크는 아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완성된 슈톨렌은 버터와 설탕파우더로 겉 표면을 마감한 후 잘 포장해 14일 이상 숙성시켜야 비로소 제 맛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음식은 정성이라고 하는 말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며 마음을 나누나 보다. 

   오늘 이웃집에서 크리스트슈톨렌 몇 조각을 보내왔다. 말린 과일과 견과류가 촘촘히 들어박힌 모습이 풍요롭다. „보시다시피 우리 집은 무탈합니다. 이웃도 안녕하시죠? 메리크리스마스! 이런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덕분에 우리 집 식탁 위에도 조촐한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여기 또 한 해가 저문다. 올해도 우리처럼 타향에서 새해를 맞는 많은 분들에게 슈톨렌의 이 쿰쿰한 누룩 향기를 전하고 싶다.

2016년 12월 22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9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9
주 제목: 베를린에 산타 할아버지가 두 번 오시는 이유

늘은 유럽의 유명한 전설 한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옛날에 가난한 한 아버지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한 나머지 결혼을 시킬 수가 없자 아버지는 딸 셋을 모두 매춘부로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교회의 주교는 그날부터 매일 밤 딸들의 방을 몰래 찾아가 창문으로 금 덩어리 하나씩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삼일 째 되던 날밤 주교는 결국 아버지의 눈에 뜨이게 되었다. 아버지가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묻자 그는 „니콜라우스라 대답했다. 성인 니콜라우스의 전설이다. 

   성 니콜라우스는 4세기 초 Myra(뮈라)지방, 오늘날의 터키 안탈리아 근방, 에서 활동했던 주교로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아 부유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또 가난한 사람을 돕기 좋아하는 성품 덕에 오늘날까지 수많은 전설 속에 살아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Nikolaus(니콜라우스)라는 이름은 줄여서 „Klaus(클라우스) 또는 Niklas(니클라스)라고도 불린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마다 발음과 철자가 달라서 성 니콜라우스는 언어에 따라 Saint Nicholas, Sinterklaas 또는 Santa Claus가 되기도 한다. 지금쯤 몇몇 독자 분들께서는 무릎을 탁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들의 산타클로스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베를린에서는 그의 축일을 기념해 매년 12월 6일이면 니콜라우스를 대신해서 부모들이 밤에 몰래 아이들의 머리맡에 놓인 빨간 장화 속에 선물을 넣어놓곤 한다. 이 날은 „니콜라우스의 날이라 불린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치며 니콜라우스의 날은 많은 지역에서 12월 24일로 옮겨졌다. 가톨릭과는 달리 개신교에서는 성인들의 축일을 기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루터는 기쁨을 가지고 오시는 이는 „아기예수라고 강조하였지만 아무래도 손에 잡히는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사람들에게 니콜라우스는 잊히지 않았다. 

   이후 많은 시인과 작가와 예술가들에 의해 니콜라우스는 점차 환상 속 초상으로 변해갔다. 종교적 색채를 잃은 성직자의 엄숙한 제의는 우스꽝스러운 코트와 털모자가 되었고 충실한 머슴 Ruprecht(루프레히트)의 자리는 코가 밝은 사슴 루돌프가 차지했다. 

   상업화 또한 필수적인 수순이었다. 온갖 반짝이는 것들과 깜박이는 것들로 치장한 산타클로스와 그의 친구들은 1930년대 초부터 코카콜라의 몽환적인 겨울 광고에 등장해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렇게 세기를 지나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다시 독일 땅을 밟은 산타클로스는 북극에서 왔다는 숱한 소문 속에 „Weihnachtsmann(바이낙츠만)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바이낙츠만은 독일 전역에서 12월 24일을 즈음해 활약해왔는데 최근 들어 상업화의 표상으로 간주되어 환영 받지 못하는 곳이 해마다 늘고 있다.

   진실이 구겨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환상은 피어난다. 허구는 또 다른 허구를 낳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젠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습성이 있다.

2016년 12월 8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8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8주 
제목: 트럼프 현상이 주는 교훈

요일 늦은 오후,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불붙어 버린 아이들의 열띤 토론에는 그날 스페인어 시간의 흥분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날은 중요한 스페인어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3년을 배워오고 있지만 통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과목이다. 성적이 형편없는데도 시험공부조차 하기 싫은 과목, 스페인어는 17살 우리 쌍둥이들에게 그런 과목이다.
   이렇듯 하품 나던 스페인어 시간이 그날은 달랐다고 했다. 수업 전 모두들 조용히 단어장을 뒤적이고 있는데 법석을 떨며 등장한 한 아이가 있었다.
   “너희들 알아? 트럼프가 대통령 됐대. 미국 사람들 다 미친 거 아냐? 
이렇게 시작된 토론은 선생님께서 오실 때까지 커져만 갔던 모양이다.
   „토미 말이 맞아. 미친 거야. 이거야 말로 미국 판 브렉시트지.“
   „야 닐스! 그래도 전 국민이 미쳤다는 건 좀 심하잖아.“
   „트럼프가 메르켈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알기나 해? 이민자에 대해선 또 어떻고? 그러는 트럼프의 할아버지도 독일인 이민자였다며?
   당연히 처음에는 선생님도 토론의 열기를 잠시 누그러뜨려 보려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자 가만히 기다리시던 선생님께서 돌연 이런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너희들 그렇게 할 말이 많아? 좋아. 그러면 실컷 해봐. 단 독일어는 사용 금지야!
하시면서 칠판으로 돌아선 선생님께서는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1. 트럼프 현상은 더 큰 변화의 전초전일까?
    2.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3. 트럼프의 당선이 시사하는 정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토론의 주제는 이 세 가지야. 스페인어로는 어떤 질문을 해도 좋아. 자기의 생각을 알아듣게 발표한 모든 사람에게 1점(최고점)을 주겠어.“

   기적은 그 다음부터라고 했다. 평소와는 달리 아이들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손을 드는 바람에 우리 아이들도 열심히 사전을 뒤적여가며 토론에 참여했고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1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집에 와서 까지도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막내는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입장인 반면 첫째는 트럼프가 어마어마한 자산가인 점을 들며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을 밀어붙이기에 힐러리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자 신문에 비친 그 주간 다른 학교들의 모습도 마치 같은 연극인양 흡사하다. 선생님들은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멈출 수 없었던 상황을 묘사하며 학생들이 „쇼크에 빠진듯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잇달아 다수의 상식은 무너지고 기계들의 예언이 적중하는 게임 속 세상처럼 변해가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꿈은 어떻게 변해 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2016년 11월24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7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7
주 제목: 크리스털의 밤

19세기후반에 등장한 <인종 불평등론>과<19세기의 기반>에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와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은 인류를 „높고 „낮은 인종으로 구분하고 특정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백색인종으로 둔갑한 아리아 인의 우월함은 이후 국가사회주의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만행까지 이 책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케케묵은 고서에서 발췌한 궤변의 일부에 나르시시즘을 입혀 진리로 둔갑시키고 그것으로 권력의 칼을 갈아 휘두른 히틀러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사상, 나치즘이야 말로 추악한 이단(異端)의 전형이다.

   1938년 11월 7일, 17세의 폴란드계 유대인 청년 헤어쉘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은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 (Ernst Eduard vom Rath)를 암살한다. 외교적으로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리아인임은 분명했던 라트가 결국 사망하게 되는 이 사건은 나치들에게 아주 좋은 선동의 기회가 된다.

   „우리 독일 민족이 이 일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직도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우리의 상권을 점령하고 삶을 누리며 독일인에게 집세를 받아 챙기고 있는 와중에 밖에서는 같은 족속의 인간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독일 외교관을 쏘아 쓰러뜨렸다. […]

   결국 이 사건은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 사이에 벌어진 11월 포그롬, 일명 „크리스털의 밤을 촉발시킨다. 폭력과 방화로 1400채가 넘는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타고 집과 상점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여자들이 농락당하고 남자들이 고문에 쓰러지는 가운데 그 기간에만 4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고 이후 3만 명이 강제 수용되게 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1938년 11월 9일 오전, 독일 만하임에서 한 소년이 목격한 장면이다.
   “산산이 부서진 식료품 가게의 유리창으로 사람들이 통조림 깡통들을 밖으로 나르고 있었다. 2-3층쯤 되는 곳에서 피아노 한대가 떨어져 부서지더니 다른 창문으로는 라디오가 날아와 처박혔다. 차도며 보도며 온통 부서진 유리와 도자기 조각들로 뒤덮였다. 창문유리만이 아니다. 한 구석에 베이클라이트로 만들어진 빗이 떨어져 있었다. 값비싼 물건이었다. 내가 그것을 주우려 하자 엄마는 내 손을 탁 치며 나를 잡아끌었다.”

   거리를 뒤덮은 유리 파편들이 가로등불 밑에서 빛나던 밤 „크리스털의 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이름마저 조소에 찬 크리스털의 밤, 이 날의 참상은 과연 유대인들만의 비극이었을까? 
   소방관들은 지옥으로 변해가는 도시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유대인을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소리치며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 해야만 했다. 유대인을 위해서는 사망진단서를 발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 날을 회상하며 아픔에 눈물짓는 것은 정부가 아니다. 소방관이며, 의사들이며, 노인이 된 어린 소년 소녀들이다. 

2016년 11월10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6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6주 
제목: 독일의 할로윈(핼러윈으로 정정 2016)

를린의 가을은 회색 숨을 쉰다. 도시가 온통 회색 빛에 젖어 들고 있다. 게다가 요즈음은 슈퍼마켓이며 백화점마저 시커멓게 도배를 하고 나섰다. 할로윈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All Hallows' Eve 줄여서 Halloween은 그 유래를 따라 가보면 꽤 역사 깊은 켈트 족의 명절이다. 다음 날인 가톨릭의 모든 성인 대 축일보다도 역사가 깊다면 깊다. 하지만 오늘날 할로윈의 모습이 그 깊은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할로윈은 한 바퀴를 크게 돌아 독일에 들어왔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이라크가 쑥대밭이 되자 독일인들은 매년 열리던 대규모 카니발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화려한 가면과 의상을 입고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정말 웃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카니발용 제품을 납품하던 완구 및 의류업체 관련 종사자들이 그들이었다. 일 년에 한번 대목을 보는 업종인 만큼 그 충격은 대단했다. 작은 회사들은 도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미국의 할로윈이다. 당시 독일에도 뿌리식물에 얼굴을 조각하는 비슷한 풍습이 있었고 이미 생산된 장신구며 화장품 그리고 의상들만 가지고도 할로윈 산업의 반 이상은 이루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장들은 즉시 추가 생산에 돌입했고 아시아 산 고무 탈이며 플라스틱 거미와 해골들이 다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적극적인 할로윈 홍보도 시작되었다.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영화나 출판물로 포장되어 할로윈은 급속도로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문화의 전파 속도는 그야말로 빛의 속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외형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독일의 할로윈이 그렇듯 한국에서도 한국의 실정에 맞게 적당히 왜곡된 할로윈 파티가 열리고 있을 거라 짐작해본다. 여기서 필자는 오늘날의 할로윈이 본래의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넘어 상업화될 대로 상업화된 수조 원 규모의 소비의 축제라는 점을 한번 상기시키고 싶다. 독일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은 학부모들과 공유했던 생각이다. 유치원 때부터 몇 년간 매년 아이들의 파티 의상을 만들어 입히면서 원하는 대로 입혀 보내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흘낏거리는 의상을 사자니 하루치 즐거움의 값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한편 이제는 어른이 다 되어 할로윈 파티를 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할로윈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말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좋은 면도 있다는 뜻이다. 성탄절이나 부활절과는 달리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날이라는 점이 그 중 하나며 또 어린아이들에게 귀신놀이만큼 큰 재미를 선사하는 것도 드물다는 주장이다. 듣고 보니 수긍이 가는 점이 없지는 않다. 모쪼록 할로윈이 이런 점마저 망각한 채 몇몇 잡귀들의 호화파티로 자리 잡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6년 10월27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5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5
주 제목: 독일 통일의 날의 풍경
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도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차가 시내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생기를 더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였다. 약간의 흥분과 또 약간의 알코올 덕분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이 오늘이 평소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10월 3일, 오늘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된 날이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 공식 행사 외에도 독일 전역에서 크고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물론 베를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베를린에서는 요즘 건축물에 형형색색의 빛을 비추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빛의 축제가 한창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기차가 시내 한복판을 지나갈 때쯤 되자 기차 안은 완전히 만원이 되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너나할것없이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영국식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좀 전에 그곳에서 그것을 봤냐는 둥, 정말 멋지지 않았냐는 둥,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는 둥, 어디에 가면 멋진 파티가 있을 거라는 둥, 깔깔거리며 마치 자신들 이외에는 모두가 풍경이라는 듯 그들만의 분위기에 심취에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그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같은 날 조금 눈치 없는 관광객 몇 명에 신경을 쏟을 사람들도 없었다. 사람들은 한두 번 힐끗힐끗 눈길을 주고는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귀에 익은 구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나가라. 독일을 떠나라! 메르켈과 외국인은 독일을 떠나라!
   구호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목소리를 더해가며 반복되고 있었다. 기차 안에는 순식간에 정적 아닌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나기 시작한 곳을 응시했고 그곳에는 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조금 있자니 군데군데에서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입 닥쳐! 조용히 좀 합시다!
   그러더니 어딘가에서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당신들의 애국심은 높이 사는 바요. 하지만 데모는 지정된 장소에서 하시오. 행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의 그 흉한 구호를 독일인의 구호라 착각할까 두렵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차 안은 고성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오늘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이와 같은 시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둘로 갈라놓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쉽다.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지며 동 서가 부둥켜안던 순간의 그 어마어마한 감격도 어느새 역사책의 한 귀퉁이로 사라져 간다. Deutschland einig Vaterland(우리의 조국은 하나) 26년 전 오늘 독일을 뒤흔들던 이 세 마디는 분명 독일인의 구호였다.

2016년 10월13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4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4주 
제목: 유럽 언어의 날을 맞아

년 9월 26일은 유럽 언어의 날이다. 유럽 연합 안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언어들을 지키고 보존하며 새로운 언어 습득을 독려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날이다.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회, 연극, 포럼 등에서 이날만은 그 지역의 사투리가 표준말을 제치고 당당히 모든 행사의 주인공자리를 차지한다.  
   독일에도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다. 베를린도 예외는 아니다. 그 중에서도 표준어에 익숙한 귀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이 있다면 단연 Plattdeutsch(플라트도이치)가 아닐까 싶다. 가끔씩 단어가 들리기는 하지만 한 문장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기 때문이다. 

   표준어를 일컫는 Hochdeutsch(호흐도이치)Hoch은 높다는 뜻을 가진 반면 플라트도이치의 Platt은 납작하다는 의미를 가진 표준어의 Platt과 철자와 발음이 모두 일치한다. 게다가 플라트도이치가 사용되는 북서부독일과 네덜란드 일부는 비교적 산이 적고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어 언뜻 낮은 지방의 독일어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플라트도이치의 Platt의 어원은 납작하다는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Hoch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만인의 언어 라는 뜻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면 플라트도이치로 기록된 문헌이 남아있기도 하지만 점차 호흐도이치에 밀려나면서 북부지방의 방언으로 간주되었고 현재까지도 한 가지 문법과 표기법으로 정리되지 못한 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엄밀히 말해 플라트도이치는 독일의 표준어 호흐도이치의 방언으로 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플라트도이치가 호흐도이치와 마찬가지로 서 게르만어군에서 파생된 언어이기는 하지만 호흐도이치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플라트도이치와 호흐도이치는 서로가 서로에게 방언인 셈이다.

언어의 날을 맞아 베를린의 각 학교에서도 이런 저런 행사들이 열린 모양이다. 학교에 다녀온 막내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내가 한국 대표로 질문을 받았는데 북한말은 한국말의 사투리야? 아니면 독립된 언어야?
이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스스로 한 번도 통일된 한국의 표준말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국제적으로 남과 북의 언어가 구분되어 인정받고 있는지 여부도 알지 못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뭇거리고 있자니 막내가 답답한 듯 대답을 대신하고 나섰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어.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다. 그래서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남한과 북한은 통일된 한반도의 표준어에 대해 논의 해볼 기회가 없었다. 아마 통일이 된다면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말이 사투리라 주장하며 다툴 것이다. 맞아?
   이 글을 읽는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우리 막내의 주장에 어떤 설명을 덧붙여 주실지 궁금하다.

   1990년대 말부터 플라트도이치는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인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2016년 9월28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3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3
주 제목:"Wir schaffen das"

Wir schaffen das -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8월 31일, 메르켈 총리의 유명한 이 한 마디와 함께 독일의 난민포용정책이 본격화 된지도 이제 일 년을 넘어서고 있다. 물론 이날 메르켈 총리의 기자회견 연설이 이 세 단어로만 구성되었던 것도, 또 특별히 이 세 단어가 강조되었던 것도 아니다. 

   “독일은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은 정당한 일이며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어왔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는 맥락의 연설 중에 유독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대목만이 유명해졌다. 그 이유는 총리의 난민정책이 그만큼 격렬한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는 비판의 목소리에 직면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로부터 1년, 굵직한 신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란 과는 별개로 난민문제만을 위한 지면을 따로 마련하여 다루고 있고 시장에서 거리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는 일도 이제 모두에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저 매체를 통해서 보았던 사람들과 어느새 우리(Wir)는 우리의 빈 의자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웃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너무 낯설다. 매일 들려오는 뉴스를 듣다 보면 두 문화나 종교가 어울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루하루 새삼 느끼게 된다. 

며칠 전 RBB 방송국에서는 조혼 문제를 다루었다. 독일 사람들의 눈으로는 중세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조혼 풍습이 시리아에는 아직도 존재하며 실제로 12세에서 16세 사이의 많은 여자어린이들이 10살 정도 연상의 남편과 심지어는 아이까지 데리고 독일로 들어왔다는 뉴스였다. 베를린에서는 접수된 100여건의 조혼 사례 중 아이가 없을 경우 18세 이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기로 하고 남편을 보호자로 인정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부르카나 니캅 문제는 이미 새롭지 않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는 이슬람 문화의 여성복장 이야기다. 한 문화 속에 존재하는 가치나 정당성을 무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악수를 청하고 쉴 새 없이 눈빛을 교환하는 독일 문화 속에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결국 법정이나 관공서, 대중교통, 학교 등에서 부르카와 니캅 착용이 불법화되었다. 

   옳고 그름도 아니요 선과 악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다름에서 비롯되는 이런 충돌이 누구의 상식선에서 판가름 되어야 할까? 같이 살고자 하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다.
문득 얼마 전 TV에서 본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머리를 스친다. 우리 한국은 소원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은 할 수 있다.” 없다.”를 논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일은 해야만 한다. 해내야만 한다. Wir schaffen das

2016년 9월8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2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
12 주 제목: 독일의 대학 입학시험 아비투어2


학 입학을 희망하는 독일의 모든 고등학생들은 아비투어(Abitur)라는 졸업시험을 치른다. 아비투어는 시험방식에 있어서 도시마다 차이를 보인다. 시험과목이나 구술시험의 형식 등이 약간씩 다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논술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구술시험으로 점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단1번의 프레젠테이션 기회밖에 허락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일반적으로 아비투어 준비는 3년 전부터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베를린의 경우 아비투어를 치르기 3년 전부터 학생들은 시험과목 선택을 시작한다. 선택과목 중에서도 특히 두 과목은 꼭 심화 과정을 따로 이수해야 하고 아비투어 점수에서도 이 두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을 요한다. 올해 아비투어에서 900점 만점을 기록한 안토니아 아른트 학생의 경우 라틴어와 생물을 선택했다고 한다.

   과목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처음에는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두 과목을 골라 수업을 듣기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도 교사나 다른 학생들과의 실력차이를 고려해 몇 번씩 과목을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각 과목의 지도교사들은 이 기간에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상담하면서 결정을 이끌어내고 또 학생들의 선택을 최대한 반영하는 모습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학생들은 점차 자신의 적성이나 흥미를 넘어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의 수업환경이나 경쟁상대 등 주변요소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두 학기에 걸쳐 과목 선택이 완료되면 본격적인 시험 준비 과정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득점경쟁의 시작인 것이다. 베를린의 경우 아비투어 2년 전부터는 학급과 담임선생님이 없어지고 학생들 개개인이 마치 대학 강의를 듣듯 수업을 찾아다녀야한다. 이때부터 받는 점수 중 대부분은 아비투어점수에 포함되기 때문에 입시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한 사람이 가진 모든 능력을 완벽히 가늠할 수 있는 시험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유용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훌륭한 시험들이 많다. 아비투어도 분명 그 중 하나다. 아비투어는 학습능력만을 평가하는 시험이 아니다. 논술과 구술시험을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와 언어구사 능력이 필수적이고 3년간의 시험 준비 과정은 학생들에게 좋은 결과를 향한 의지를 비롯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능력, 처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 그에 맞는 전략을 세우는 능력에 더해 지구력, 사회성까지 요구한다.

   아비투어 준비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시험 결과를 떠나 이 3년간의 준비과정만 잘 마쳐 준다면 어엿한 대학생으로 손색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올해 18살 안토니아 아른트 학생은 아비투어 만점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숙제를 미루지 않았던 것을 들었다고 한다. 시험의 내용이나 형식은 달라도 만점의 비결은 언제나 비슷해 보인다.

2016년 8월25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1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1
주 제목: 독일의 대학 입학시험 아비투어1

를린에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2주가 흘러가고 있다. 독일은 8월을 기준으로 학년이 올라가기 때문에 여름방학이란 즉 한 학년의 끝이자 새 학년의 시작을 의미한다. 중등 및 고등과정 시험은 물론 대학입시까지 모두 끝나고 그야말로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시기다. 

   오늘 신문에는 그런 학생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기사가 하나 있다. 베를린에서 한 여학생이 올해 대학입학시험 아비투어(Abitur)“에서 만점을 기록했다는 기사다. 900점 만점에 900점. 시에서 대입 성적을 통합 관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가보다. 
   우리 아이들도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인 아비투어 준비과정에 돌입한다.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학교생활을 해 내고 있는 두 아이를 둔 학부모의 눈으로도 아비투어에서 만점이란 점수는 도무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아비투어가 오랜 기간에 걸쳐 다방면으로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어의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기에 앞서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독일의 교육과정을 지켜보며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을 들자면 학습 능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전 학년을 통틀어 평가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논술과 구술시험이 있다. 그 외에도 과제수행 여부나 수업 참여도 등이 점수화되어 반영되지만 객관식 평가는 없기 때문에 성적은 과목별로 담당교사 1명에 의해 상대평가로 산출된다. 학부모입장에서 솔직히 처음에는 이점이 많이 불만스러웠다. 학생들에게 마음에 드는 선생님과 안 드는 선생님이 있기 마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선생님에게서는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 점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투덜대는 아이들의 푸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어설픈 위로의 말을 찾기에 급급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 점도 큰 공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어느새 점수를 선생님에게서 받는 숫자를 넘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세상의 인정도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항상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11학년 정도 된 학생들은 이제 확실히 알고 있다.

   한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은 대략 6-10명의 과목별 담당교사를 새로 만난다. 각 교사마다 고유의 교육 방법과 평가방법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얼마간 교사와 학생, 또 학생들 간의 치열한 탐색전이 벌어진다. 한 학기에 한 학생이 많게는 10번의 이 같은 전쟁을 동시에 치러내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각자가 가진 무기에 대한 자각이다. 즉 자신만의 강점을 스스로 찾고 깨닫는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강점과 또 약점을 파악한 학생들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시험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나간다. 이것이 독일의 대학 입학시험 아비투어의 시작이다.

2016년 8월11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0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0주 
제목: 여름을 추억하며


전거 하이킹을 나갔던 막내가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나 비오니?
   “얼마나 많이 왔는데. 엄마는 몰랐어?
   그제야 창문 밖을 보니 지나간 비바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작은 웅덩이가 파였고 미처 물방울을 털어내지 못한 나뭇가지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며칠째 25도를 웃돌며 제법 여름 흉내를 내던 날씨가 뚝뚝 떨어지는 빗물 소리와 함께 20도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고등학생 무렵, 어느 해 장맛비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모두 앗아갔다. 무언가에 놀란 듯한 엄마의 비명소리에 허겁지겁 층계를 내려갔을 때 지하는 이미 빗물에 잠겨있었다. 여기저기로 스며든 빗물에 바닥에 깔린 장판이 10센티는 족히 위로 떠올라와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 한구석에 켜켜이 누워있던 앨범들 속에서는 오랜 세월에 누렇게 변해가던 흑백 사진들이 하나 둘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양복과 지팡이가 멋지게 어울리던 할아버지 사진도 믿을 수 없이 예뻤던 교복 입은 엄마 사진도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번져버린 후였다.

   그로부터 매년 여름 지하실은 물에 잠겼다. 장마철이면 온 가족이 창문 틈마다 걸레를 끼워 넣고 바닥에는 못쓰게 되어버린 이불을 깔아 빗물과 전투를 벌였다. 서너 장의 이불이 흥건히 젖으면 그 이불들을 동생들과 내가 걷어 세탁기에 넣었다. 탈수가 끝난 이불은 엄마가 다시 지하실 바닥에 깔아 놓았다. 어떤 날은 밤새도록 내리는 비에 온 가족이 번갈아 가며 이불을 걷어내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탕물을 뒤집어쓴 막내 동생이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기다려 누나. 내가 크면 여기를 아예 수영장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시간은 쏜살같다. 그로부터 20년, 막내는 정말 커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비록 수영장은 만들지 못했지만 이제는 엄마도 동생들도 장맛비에 밤을 지새우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이곳 독일에서 오랜 시간 장마를 잊고 살고 있다. 가족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여름을 싫어했던 나는 소원대로 한 여름에도 스웨터와 목도리를 옷장에 넣어두지 못하고 20년을 살았다.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장마를 잊고 살다 보니 여름을 잊고 살았다.

   장맛비가 걷히면 우렁찬 매미 소리에 아버지의 서재가 말라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먹던 수박이며 참외는 참 꿀맛이었다. 작은 게들과 조개들이 놀던 해변이며 포근한 바다, 할머니 댁 평상 위 선풍기와 낮잠, 그리고 잠자리 또 방아깨비…… 내가 여름이라 불렀던 그 모든 것들이 장마와 무더위를 견뎌내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와 날씨변화가 심해지고 있는 요즘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20년이 흐른 후에 우리는 무엇을 추억하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게 될 그 무엇인가는 우리가 이미 잃은 것 일거라는 사실이다. 
   옷걸이에 걸린 스웨터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이제 창문을 닫아야겠다.

2016년 7월 21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노란 바람

문 밖이 노랗게 얼어 붙었다. 
노란 바람에 취한 떡갈나무 가지들이 
양팔을 휘두르며 춤을 춘다.
고개를 휘저으며 몸부림친다.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해설까. 
대지는 못 본척 고요히 숨죽였다.
고개 숙인 풀잎들만 떨고 서있다.

머지않아 지진이라도 날듯 하늘이 갈라지며 
저들에게 눈물을 퍼부을 것이다. 

- 2016년 7월 9일 여기는 베를린

베를린 살이9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9주 
제목: 마이바흐우퍼 재래시장3 (The end of the Maybachufer trilogy)

기 값이 뚝 떨어졌다. 나는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늘 구매목록에도 딸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을 한참 서성였던 이유는 어릴 적 딸기에 대한 추억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갔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는 3가지의 딸기가 있었다. 매년 처음 나오는 딸기는 알이 굵고 꼭지부분은 하얀 것이 끝으로 갈수록 빨갛게 여물어 있었다. 위풍도 당당히 줄지어 앉아있던 그 딸기가 어린 내 눈에는 참 맛있게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먹을 때가 아니라며 사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이 오실 때면 그 앞에는 어김없이 그 딸기가 포크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정신 없이 딸기를 주워 먹었다가 엄마한테 한번 혼이 난 그날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손님상에 있는 딸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더 이상은 딸기가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내 생일이 돌아올 때쯤 되면 두 번째 딸기가 한창이었다. 포장 용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수북이 쌓여 있다가 하나 둘씩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두 번째 딸기는 몸 전체가 빨간 대신 덩치는 첫 번째 딸기보다 훨씬 작았다. 매년 생일이면 엄마는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며 접시마다 딸기를 곁들여 생일상을 차려 주셨다. 실컷 먹으라며 내 앞으로 딸기 접시를 옮겨 주셨다. 

   시장에서 딸기가 거의 사라져갈 때쯤이면 아저씨들이 딸기 수레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두 번째 딸기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에 부대낀 얼굴이 짓물러 터져있던, 천 원만 내도 보따리 가득 주는데도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던 그 딸기를 이모는 항상 몇 보따리씩 사셨다. 그리고 깨끗이 씻어 며칠을 끓여서 딸기잼을 만들어 주셨다. 식빵 위에서 곱게도 빛나던 그 딸기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더 맛있는 잼을 먹어 본 적도 없다.

   베를린에는 지금 딸기 철의 제2막이 올랐다. 한국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딸기야말로 어린 나에게 일찌감치 비논리를 보여주며 논리를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이었다. 덕분에 납작한 복숭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금”키위라는 것이 나왔을 때도 나는 하루 빨리 그 맛을 보려는 사람들 틈에 끼어 고생하지 않고 얌전히 때를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가지고 있어 가지고 싶지 않고 가질 수 없어 가지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은 업보일까? 
   스산한 독일 날씨에 불쌍히 떨고 있는 용과나 파파야 등의 열대 과일이나 새로운 농업기술발전의 산물 앞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열매는 그냥 아프리카에서 먹으면 안 되나? 저 맛없는 파파야가 파파야나무 밑에서는 얼마나 귀하고도 맛난 열매일까? 욕심, 문득 이 단어가 떠오른다. 한곳에 앉아 온 세상을 만질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이 시대의 희망도 어쩌면 우리들의 허황된 욕심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저쪽에 마지막 가게가 보인다. 하얀 옥양목과 빨간 산딸기, 같이 있어 좋을 것 하나 없는 딱 두 가지를 파는 괴짜 아저씨가 주인이다. 저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나면 집으로 가는 길이 눈앞에 놓여있다. 결국 사려던 오렌지와 망고는 포기해야겠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머나! 아저씨 오늘은 오렌지네요!”

2016년 7월7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8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8
주 제목: 마이바흐우퍼 재래시장2

시의 삶 속 재래시장은 시장 그 이상의 곳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재래시장에 나와 제 철 맞은 과일이나 채소를 보며 지갑을 열까 말까만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득 내 나이를 다시 세어보기도 하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끔은 재래시장에서 본 이런저런 모습들이 사진처럼 찍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기도 한다. 한 줌 콩나물을 사느라 마주친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떡 하나 더 주시던 아주머니의 손짓이 어느새 내 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와 있다.

   마이바흐우퍼 터키시장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들어가는 길이 끝나고 나오는 길이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 있는 고등어구이 샌드위치가 아닌가 싶다.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고등어구이 냄새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시장 깊숙이까지 끌어들이니 말이다. 

   고등어구이 샌드위치는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 가장자리가 바삭 해진 고등어에 소금과 레몬즙으로 간을 맞추고 야채를 곁들여 긴 빵에 끼워 먹는 음식이다. 오늘도 그 모습에 배가 먼저 요동을 치는걸 보니 내 점심메뉴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

   독일 사람들 중에는 생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냄새에 이끌려 그곳까지 와서는 들여다보고 선뜻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아무 거리낌 없이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하는 나를 오늘도 한 아주머니가 신기한 듯 쳐다보며 미소 짓는다.

   한편, 바로 옆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먼저 온 이가 마치 옹달샘이라도 찾은 듯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러들이고 달려온 친구들의 얼굴은 석쇠를 보자마자 이내 어린아이 같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시끌벅적 수다를 떨어가며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금방이라도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길긴 하지만 사람 냄새와 함께 숯불 냄새를 흠뻑 뒤집어 쓸 수 있어서 나는 그 시간이 좋다. 붙임성 좋은 주인아저씨는 오늘 또 나보고 어디 사람이냐고 묻는다.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아 한국! 안녕하세요?” 하며 아저씨가 웃는다. 볼 때마다 같은 대답이다. 하긴, 이 재미도 이 고등어구이 샌드위치의 맛에 녹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완성된 빵을 받아 들고 강가 쪽으로 몇 발짝 움직이면 젊은이들의 간이 콘서트 장이 마련되어 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 통나무 다리 위에서는 라이브 공연이 펼쳐진다. 청중들은 모두 바닥에 제멋대로 앉아 삼삼오오 수다를 떨고 있다. 그 자유로움 덕분에 나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비린내가 흥을 깰까 싶어 강가 쪽 가장자리를 골랐다. 

   잠시 오리들에게 시선을 뺏긴 사이 터키인으로 보이는 한 할머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는 고등어구이가 들려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한 입을 베어 무나 했는데, 할머니가 주섬주섬 깔고 앉았던 비닐봉지 중 한 장을 빼내 나에게 내민다. “엉덩이” 비록 말은 그 한 마디 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뜻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계속>

2016년 6월23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슬픔의 하수도 시스템


일 날에는 쏴쏴 비가왔다. 
그가 왔다. 
그가 와서 쏴쏴 말을 걸어 주었다. 
인디언 밥 같은 외로움이 그 목소리에 젖은 듯 부드러워 지는 것 같았다. 

얼마 안가 회색 빛 시멘트가 뽀얀 얼굴을 드러내자
도로 위의 삶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최면에서 깬듯 태연하게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빗물이 가듯 슬픔도 가는 길이 이미 구비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잠시 나를 적실 뿐.

창문 밖에 날아온 참새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다닌다.
그 통통한 배를 보니 가슴이 다시 떨린다.
폴짝폴짝 튀어 오를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리면
이야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베를린 살이7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7주 
제목: 마이바흐우퍼 재래시장1

늘은 재래시장이 서는 날이다. 베를린에는 재래시장이 꽤 활성화 되어있다. 생선, 치즈, 햄 등을 파는 상설 재래시장도 있고 정기적으로 서는 청과물시장도 있다. 오늘 갈 곳은 일주일에 두 번 서는 터키 시장 마이바흐우퍼다.
   섭씨 28도, 때 이른 무더위에 반바지에 슬리퍼 그리고 모자까지 눌러쓰고 나는 집을 나섰다. 한 30분 유유자적 걸어볼 셈이다.

   모퉁이를 돌아 시장 입구에 들어설 때면 어김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음악이 있다.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제 7곡 [리모주의 시장]이다. 강가를 따라 펼쳐진 가판대의 하얀 지붕들과 목청껏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노랫소리, 하얀 앞치마 밑으로 잰 걸음을 놓는 터키 아주머니들의 뒷모습, 이 모든 것의 조화가 그 경쾌하면서도 되알진 선율과 꼭 닮았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늘어선 이 시장을 보는 방법은 어느 쪽이던 한 쪽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오늘은 강가 맞은편으로 들어섰으니 먼저 “고깃간”에 들러보자. 내가 이곳을 굳이 “고깃간” 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정육점” 이라고 부르기에는 내가 아는 정육점의 모습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고기의 종류는 딱 2가지, 쇠고기와 양고기뿐이다. 439그램짜리 깔끔한 포장 육 따위는 없다. 무조건 킬로 단위로 판매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1킬로를 달라고 하면 꼭 듣는 말이 있다. “1킬로 5유로, 3킬로 10유로, 3킬로 오케이?”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무게 나가는 과일은 그만두고 채소 몇 단 사기도 전에 집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분홍빛 형광등 하나 없이 살점만 가득한 이 으스스한 가게에는 항상 문 밖까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고기를 사기 위해서이다. 먼 곳에서 날아왔다는 1등급 3플러스 프리미엄 스테이크를 사러 온 사람은 없다. 단지 베를린 어딘가에서 오늘 공급된 신선한 고기를 사러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1등급 스테이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고기들은 구매자의 오늘 식단과 보는 눈에 달려있다. 그래서 그런지 고기를 고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뭇 중고차를 고르듯 진지하다. 고기에는 정말 문외한인 나는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3킬로의 유혹을 뿌리치고 장조림 감 1킬로를 사가지고 만족스레 가게를 나왔다. 

   시장은 때때로 그 어떤 달력보다도 무섭게 나에게 “시간”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망고, 오렌지, 아보카도 등을 살 계획이었는데 막상 와보니 그 사이 계절이 또 바뀌어 있다. 우리 막내가 좋아하는 스페인산 오렌지는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작고 푸릇푸릇했던 망고는 노랗게 살이 쪄 알아보기도 힘들고 아보카도는 값이 2배로 올랐다. 그 대신 잘 안보이던 멜론이며 수박이 눈에 뜨인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발품을 더 팔아 가는 계절의 끄트머리라도 붙들어 볼까, 아니면 일찌감치 새 것들에게 눈길을 돌려볼까?

   그러는 사이에 배낭은 점점 생각지도 못한 채소들로 채워지고 있다. 마늘잎, 민트, 루꼴라, 가볍고도 여린 것들만 골라 담고 있다. 아무래도 사려던 과일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다. 그래.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좀 더 찾아보기로 하자. <계속>

2016 6월 9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6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6주 
제목: 베를린 클룽커크라니히

1992년 리우회의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이후로 생태도시, 에코시티 등의 개념이 널리 퍼지면서 지붕녹화와 같은 형태의 생물 다양성 생태도시 조성을 위한 노력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베를린에서도 2015년 Die Grünen(녹색당)이 1000개의 지붕을 녹색으로 물들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놓기도 했지만 별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올해 다시 CDU(기민련)소속 슈테판 에버스가 2030년까지 베를린을 녹색지붕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행정절차 간소화를 추진하고 있다.

   물론 녹색지붕을 만드는 이유가 노스탤지어나 도시 미관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효과만 보더라도 지붕 위에 덮인 토양층이 많은 양의 수분을 흡수해 저장하고 그것이 천천히 증발됨에 따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할 뿐만 아니라 강수량이 많은 시기에 하수도로 유입되는 빗물의 양을 줄여 범람을 방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붕을 녹화하는 것만으로 어디서나 이러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기후, 토양, 강수량 등에 따라 때로는 큰 예산 낭비를 초래 할 수도 있다. 결국 녹색 지붕 사업은 „녹색“보다는 먼저 „지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붕이나 옥상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잘“ 활용할 수 있을까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슈테판 에버스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베를린에 이런 곳을 많이 만드는 것“ 이라며 베를린 노이쾰른 지역의 „클룽커크라니히“(http://klunkerkranich.de) 라는 곳을 구체적인 예로 들기도 했다.

   클룽커크라니히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쇼핑몰 옥상에 자리 잡은 조금은 색다른 종합 문화 공간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던 멋들어진 지붕녹화의 예를 떠올렸다면 그 첫인상에 조금 실망을 할 수도 있겠다. 삐걱거리는 탁자에 작은 공연장, 꼬마 손님들을 위한 모래놀이터와 소박한 화단, 그리고 커다란 고양이 얼굴이 간판을 대신하는 허름한 바 하나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일주일 내내 저녁 시간을 물들이는 재즈나 팝 등의 음악 공연은 물론이고 주중에 열리는 원예 강좌나 천연염색 워크숍에는 사람들이 만원이라 때로는 예약이 필수라 한다. 주말에는 하늘을 지붕 삼아 중고 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주말 저녁이면 음악 공연이 그 화려함을 더한다. 잔잔한 베이스 색소폰 선율과 함께 시작된 해넘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내리쬐는 햇빛과 나무 판을 더덕더덕 덧대어 만든 이곳저곳의 모습이 사람들의 편안한 얼굴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연스러움이야말로 베를린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특별한 관리 계획도 없이 큰 예산을 들여 만든 거창한 볼거리에 열광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모이고 누구나 잠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무대가 되고 청중들에게는 흥을 선사하는 그런 공간을 만들겠다는 젊은이들의 이상이 한 정치가에 의해 현실이 되어가는 곳, 참 베를린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중충하고 볼거리 별로 없다는 이 도시를 찾는 젊은이들이 한번쯤 들러보면 어떨까 싶다.

2016년 5월 26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5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5주 
제목: 우리가 꿈 꿀 때

일의 직업 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초등학생 때는 물론 기간도 짧고 업무를 배운다기 보다는 견학을 하는 정도로 마무리 되지만 7학년이 되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쓰기 교육이 끝나면 그 이후부터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회사나 기관에 직접 이력서를 제출해 실습 자리를 얻어내야 한다.

   자리를 얻는다는 것이 어떤 아이들한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성격이 내성적이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우리 작은 아들한테는 참 힘들고 고된 기다림의 연속이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나 거두절미하고 남은 본론마저도 간단명료하기가 그지없으니 면접 기회 한번 얻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은 자리를 못 구해서 할 수 없이 원하지 않는 곳까지 지원을 하더니 결국은 자동차 정비소에 일자리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 소문을 듣고 다른 엄마들은 나이에 비해 힘든 일자리라고 걱정했고 그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달리 도움을 줄 방법도 없었다. 첫 출근 날 아이와 함께 가서 일터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온 것이 전부였다. 정비소에는 처음 보는 거대한 기계들이 즐비했고 벽마다 수십 개의 타이어가 걸려있었다. 작업복에 작업화까지 의무적인 위험한 곳에 열네 살짜리를 남겨두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눈앞에 아이가 어른거려서 아마도 수 십 번은 길을 잘 못 들어섰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아이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했냐고 물었더니 자동차 부품 교체를 도왔다고 했다. 부지런히 저녁을 차려놓고 옆에 앉아 눈치만 살피고 있자니 몇 숟가락 넘기자마자 결국 참았던 울분을 토하듯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나 내일 또 가야 되지? 나 이러다가 일주일 지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
   다른 엄마 같았으면 이럴 때 무슨 말을 했을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서로 똑 같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나는 오늘은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고 아이는 내일 또 가야 되느냐고 되물었다. 죽을 것만 같던 우리의 일주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실습 마지막 날, 여느 때처럼 작업복에 작업화를 질질 끌고 시커먼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오늘 공장에 어떤 한국 사람이 왔었어. 타이어가 펑크 나서 내가 갈아 드렸어. 
   “어머! 네가 타이어도 갈 줄 알아?” 
   “그럼. 공장에서 이제 타이어는 나 혼자 갈아.
   그리고는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저녁 식사 중에 아이가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나 파일럿이 되면 어떨까? 도(친구)있잖아. 도가 전부터 자기도 타이어 한번 갈아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러더니 결국 비행기 정비사가 되겠다는 거야.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나는 파일럿이 좋을 것 같아! 그러면 같이 일 할 수도 있고…… 어때 엄마?”
열네 살 인생, 첫 꿈에 부푼 눈동자는 그야말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2016년 5월 11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4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4주 
제목: 어린이 날의 의미

이켜보면 어릴 적 한국의 5월은 크고 작은 행사들로 가득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어린이 날 선물을 기다리며 설레던 마음이다. 그 날이 지나고 나면 어버이날 그리고 또 며칠 후에는 스승의 날이 왔었다. 아직도 한국의 어린이들은 카네이션을 만들어 어른들께 달아드릴까?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하며 교정이 떠나가라 합창을 할까?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는 어린이날을 쇠어본 기억이 없다. 올해 독일의 5월5일은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날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날은 항상 가톨릭의 „예수승천 대 축일“과 맞물리기 때문에 매년 그런 것은 아니다.    부활절 방학이 지난 후 독일의 5월은 비교적 조용한 한 달이다. 하지만 떠들썩할 수도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날이 하루 있긴 하다. 바로 5월 8일, 나치 독일의 패망일 이다. 
   1945년 5월 8일 23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당시 7살이었던 헬가 드류스는 베를리나 모르겐포스트지에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폐허가 된 도시는 나의 놀이터였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몰랐지만 우리는 잿더미가 된 보석가게에서 진주를 찾으며 놀았습니다. 빵 가게에서는 돌가루로 케이크를 구웠죠. 너무 슬펐던 일은 할아버지 댁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내 장난감 유모차가 타버렸던 일입니다. 그래서 인형은 항상 배낭에 넣어가지고 다녔죠.

   7살 동갑내기였던 균터 라이퍼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군의 지휘에 따라 빵을 굽는 곳이 생겼죠. 그러나 미처 정돈 되지 못한 거리는 그대로였습니다. 여기저기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죠. 어머니는 빵을 사기 위해서 오랫동안 줄을 서 기다리곤 하셨어요. 그 동안 나는 그 옆에서 놀았죠. 그러다가 잘린 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주워 올렸습니다. 깨끗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른 어머니께 달려가 보여드렸습니다.

   이 기사들을 읽으며 어른이 된 내 마음은 7살 아이들의 눈에 비친 전쟁터로 끌려 들어갔었다. 전쟁과 어린이, 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슴 아픈 두 단어의 조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과 어린이날을 떠올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활짝 웃으시며 멋진 선물을 건네주실 때 우리에게 세상에는 기쁨 밖에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어린이날의 주인공이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 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아이들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누구든 최선을 다하지만 인생이 조금만 힘겨워져도 금세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 또 아이들이다. 하물며 전쟁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어른들의 이기였다. 혹시나 위험한 곳에 서 있지는 않은지,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지고 놀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이 한번쯤은 아이들을 돌아보라는 날, 이것이 어린이날의 의미가 아닌가 싶다.


2016년 4월 27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Thursday

신의 눈에 뜨일때까지 여기 있고 싶은데 언제 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만약에 만나지 못한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마웠다는 말입니다.

베를린 살이3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3
주 제목: 4월의 베를린

드득후드득 빗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시작인가보다. 어제까지는 찬찬히 온도를 올려서 겨우겨우 20도를 넘어가나 했더니 역시 4월답게 물 한 바가지 확 부어버린다. 4월비다. 4월이 드디어 게임을 시작했다. 
   오늘은 티셔츠 차림으로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을 내일은 파카에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에서 만난다. 베를린의 4월의 모습이다.

   베를린뿐 아니라 독일의 4월은 악명이 높다. 만우절에 거짓말로 사람들을 놀려주고 “April April” (아프릴아프릴)하며 깔깔 웃는다. 유치원 아이들까지 “4월아 4월아 제멋대로야. 비 왔다가 해났다가 우박까지 곁들이지......”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4월의 날씨가 이렇게 변화무쌍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아직 더워지지 못한 북유럽 쪽의 찬 공기와 남쪽의 더운 공기가 교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어른들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원성이 자자한 이유는 날씨가 우리의 일상과 그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로 옷을 입기가 너무 힘들다. 봄이라고 날씨가 며칠 따뜻해져도 마음 놓고 얇은 옷을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독일풍의 우중충한 옷차림의 이유가 여기 있다. 4월의 하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종종 시인들의 글 재료가 되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들이 있다.

     “4월은 4월은 어쩔 줄을 모르네. 통쾌하게 웃던 하늘은 금세 흐리고 비가 오는가 하면 햇살이 비추네. 울다가 웃는 너의 야단법석을 나는 이해할 수 없네. 4월은 4월은 어쩔 줄을 모르네”   
     “제비꽃도 떨고 있다. 어제 핀 제비꽃이. 되새도 숲 속에서 숨을 죽을 죽인다. 4월 너를 사랑한다. 내 기분도 너와 같다. 오늘은 따뜻하고 내일은 차갑다”
     “안타깝다 안타깝다. 눈까지 내린다. 눈이 내린다 꽃나무 위로. 꿈꾸는 모든 어린 봄 위로” 
     “마음대로 입어라. 무엇을 입던 4월에는 어차피 잘 못 입었을 테니”

   이렇기 때문에 베를린 사람들은 옷을 겹쳐 입는데 굉장히 능숙하다. 더우면 하나씩 벗어 던지고 추우면 하나씩 껴입으며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꾼다. 
   한편 농부들의 고충을 생각해보면 옷 이야기는 꺼내기도 창피하다. 그런데 4월에 부는 비바람과 눈보라가 농부들에게 꼭 미움의 대상만은 아닌 것 같다. 4월의 눈보라는 5월의 꽃보라 또는 메마른 4월은 방앗간을 멈춘다는 말도 있다. 4월비가 많을수록 수확량이 많아져서 4월에 치는 천둥은 덕담을 하는 중이고 4월의 변덕은 신의 은총이라고도 한다. 아무래도 4월의 횡포를 가장 가까이서 견뎌내는 분 들인 만큼 우리도 그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시련이 내일은 창고를 넉넉히 채워 줄 거라는 확신만 가져도 아무도 일희일비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천둥까지 가세했다. 덕담을 하나보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 아이들 학교 갈 때는 또 세 겹씩 입혀 보내야겠네. 

 2016년 4월 15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TinkersToday

The sequel of the TinkersTinkle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