おしゃべりさんへ 8

つかったでしょうか、おしゃべりさん。
私、約束守りました。
おしゃべりさんに見つけられるまで続けて行くことができるならいいですけれど、もしできなくなったら、伝えたかった言葉は、
『ありがとう』
です。

베를린 살이2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주 
제목: 봄과 손님

이 왔다. 거리가 봄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봄은 서울의 봄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따스한 햇살도 귀하디귀할뿐더러 사람들의 옷차림도 언뜻 보기엔 겨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꼭 섭씨 몇 도, 일조량 몇 프로가 되어야 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봄은, 봄이 왔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다. 

   봄이 되면 특히 활기를 띠는 곳은 고물시장이다. 왠지 모르게 낡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봄의 마술인가보다. 여전히 파카차림에 목도리를 두르고도 표정만은 한층 여유로워진 사람들이 고물시장으로 모여든다. 

   솔직히 고물시장이라고 해서 다 같은 고물시장은 아니다. 버려지기 일보직전의 물건들이 모여 있는 그야말로 쓰레기 시장부터 앤틱 가구와 골동품이 즐비한 보물시장까지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동네 고물시장은 베를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쓰레기 시장이다. 손님도 상인도 대부분 외국인, 그 중에서도 터키인이 가장 많다. 산보도 할 겸 터키 음식을 사먹거나 간단한 물건들을 찾으러 우리는 그 시장에 종종 들른다. 

   지난주 일요일 남편과 나는 꽤 오래간만에 그 시장을 찾았다가 적잖이 놀랐다. 상인들도 그대로고 물건들도 그대로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손님들로 꽉 차 시장 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 보였기 때문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절대로 팔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물건들이 팔려나가는 모습이었다. 흩어진 색연필이며 낡은 슬리퍼, 짝짝이 살림살이들이 내 눈 앞에서 속속 사라져갔다. 여느 때 같으면 그저 핸드폰이나 뒤적이며 무료히 앉아있었을 상인들이 그날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서서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시장은 이미 우리가 알던 그 쓰레기 시장이 아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멍청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낯선 옷차림의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을 때 얼마 전에 우리 동네에 새로운 난민보호시설이 마련되었다는 뉴스가 머릿속을 휙 훑고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얼굴을 아는 몇몇 상인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와서 이 비싼 물가에 어떻게 필요한 걸 다 새로 살 수 있겠어. 저 사람들이 살길은 여기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망찬 얼굴이었다.

   그 뒤로 얇은 티셔츠 차림의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딸로 보이는 한 소녀가 케밥 1개를 한입씩 번갈아 가며 나누어 먹고 있었다. 반팔 블라우스에 맨발에 까만 구두를 신은 그 어린 소녀는 한 순간도 엄마 손에 들린 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왜 나는 괜히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다시 고쳐 둘렀는지 모르겠다.

   봄이 왔다. 2016년 봄은 손님을 데리고 왔다. 부디 저 손님들에게 베를린의 첫 봄이 너무 쌀쌀맞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2016년 3월 25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주 
제목: 10년짜리 묘안

10년 전, 익숙한 관인이 비스듬히 찍힌 그 서류를 받아 들었을 때 우리는 정말 놀랐다. 이내 또렷이 적힌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을 땐 알지 못할 무언가가 닥쳐왔다는 두려움마저 일었다. 
   취학 통지서였다. 하지만 보통 취학통지서는 아니었다. 베를린에서는 당시 취학통지서를 발행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것은 “취학등록최후통첩장” 정도 되는 서류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구청으로 향했다.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 훑어보는 구청 직원에게 우리는 다짜고짜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리다고요. 학교를 다닐 만한 애들이 아니에요. 동그라미 하나도 제대로 못 그리는 4살짜리들이 무슨 학교에 가요?”
   “나 참. 쌍둥이 어머님 그리고 아버님! 뉴스도 안보십니까? 교육 정책 개혁 몰라요? PISA-리폼? 올해부터는 5살부터 학교에 간다고요. 그리고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취학 아동을 등록하는 건 부모의 의무예요. 최소한 의무는 다하셔야죠!”

   결국 그 해 우리 아이들은 1학년이 되었다. 시행 첫해라 한 학급에 우리 아이들 보다 1살 위인 아이들과 동갑내기 아이들이 반반이었다. 당시 내 눈에 대다수의 아이들은 분명 학교라는 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렸다. 연필을 쥐어주니 꽁무니에 달린 지우개가 남산타워처럼 하늘로 빼죽 치솟아 허우적거렸다. 

   3학년까지 성적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1년이란 시간의 차이가 이때처럼 크게 보인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우리 쌍둥이의 소원은 키가 커지는 것뿐이었다. 성적표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종이 따위는 애초부터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이미 각자가 스스로 매긴 자신만의 성적표를 하루하루 몸에 새겨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200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에서 하위권을 차지하면서 온 나라가 쇼크에 빠진듯했다. 이를 계기로 피사 리폼 (PISA reform) 이라는 교육 개혁안이 시행되면서 그 일환으로 베를린에서도 5세 아동들이 일 년 일찍 유치원에서 나와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개혁안을 두고 당시 몇몇 정치가들은 독일의 미래를 변화시킬 묘안인양 떠들어댔다.
   10년이 흘렀다. 오늘 나는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2017년부터 베를린의 취학 연령이 다시 6세로 높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최대 만 명분의 유치원 시설과 6천만 유로가 넘는 예산이 새로 필요하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관련 기사가 이미 여럿이었다. 그 기사들을 읽으며 몇몇 구절에서는 우리 쌍둥이의 그 시절이 떠올라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교육 정책에서만은 부모들의 의견이 철저히 우선되어야” “5세 입학 아동의 다수는 8학년이 되어서야 6세 입학 아동과의 차이를 극복했다” “어릴 적 한 번 잃어버린 자신감은 어른이 되어도 다시 되찾기 힘들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구절은 이것이었다. “PISA 2000 …… (중략) 10년이 지난 지금 쥐새끼 한 마리도 피사(PISA)를 들먹이지 않는다!”


2016년 3월 15일 이재인/프리랜서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TinkersToday

The sequel of the TinkersTinkle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