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살이1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주 
제목: 10년짜리 묘안

10년 전, 익숙한 관인이 비스듬히 찍힌 그 서류를 받아 들었을 때 우리는 정말 놀랐다. 이내 또렷이 적힌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을 땐 알지 못할 무언가가 닥쳐왔다는 두려움마저 일었다. 
   취학 통지서였다. 하지만 보통 취학통지서는 아니었다. 베를린에서는 당시 취학통지서를 발행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것은 “취학등록최후통첩장” 정도 되는 서류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구청으로 향했다.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 훑어보는 구청 직원에게 우리는 다짜고짜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리다고요. 학교를 다닐 만한 애들이 아니에요. 동그라미 하나도 제대로 못 그리는 4살짜리들이 무슨 학교에 가요?”
   “나 참. 쌍둥이 어머님 그리고 아버님! 뉴스도 안보십니까? 교육 정책 개혁 몰라요? PISA-리폼? 올해부터는 5살부터 학교에 간다고요. 그리고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취학 아동을 등록하는 건 부모의 의무예요. 최소한 의무는 다하셔야죠!”

   결국 그 해 우리 아이들은 1학년이 되었다. 시행 첫해라 한 학급에 우리 아이들 보다 1살 위인 아이들과 동갑내기 아이들이 반반이었다. 당시 내 눈에 대다수의 아이들은 분명 학교라는 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렸다. 연필을 쥐어주니 꽁무니에 달린 지우개가 남산타워처럼 하늘로 빼죽 치솟아 허우적거렸다. 

   3학년까지 성적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1년이란 시간의 차이가 이때처럼 크게 보인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우리 쌍둥이의 소원은 키가 커지는 것뿐이었다. 성적표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종이 따위는 애초부터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이미 각자가 스스로 매긴 자신만의 성적표를 하루하루 몸에 새겨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200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에서 하위권을 차지하면서 온 나라가 쇼크에 빠진듯했다. 이를 계기로 피사 리폼 (PISA reform) 이라는 교육 개혁안이 시행되면서 그 일환으로 베를린에서도 5세 아동들이 일 년 일찍 유치원에서 나와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개혁안을 두고 당시 몇몇 정치가들은 독일의 미래를 변화시킬 묘안인양 떠들어댔다.
   10년이 흘렀다. 오늘 나는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2017년부터 베를린의 취학 연령이 다시 6세로 높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최대 만 명분의 유치원 시설과 6천만 유로가 넘는 예산이 새로 필요하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관련 기사가 이미 여럿이었다. 그 기사들을 읽으며 몇몇 구절에서는 우리 쌍둥이의 그 시절이 떠올라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교육 정책에서만은 부모들의 의견이 철저히 우선되어야” “5세 입학 아동의 다수는 8학년이 되어서야 6세 입학 아동과의 차이를 극복했다” “어릴 적 한 번 잃어버린 자신감은 어른이 되어도 다시 되찾기 힘들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구절은 이것이었다. “PISA 2000 …… (중략) 10년이 지난 지금 쥐새끼 한 마리도 피사(PISA)를 들먹이지 않는다!”


2016년 3월 15일 이재인/프리랜서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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