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살이2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주 
제목: 봄과 손님

이 왔다. 거리가 봄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봄은 서울의 봄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따스한 햇살도 귀하디귀할뿐더러 사람들의 옷차림도 언뜻 보기엔 겨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꼭 섭씨 몇 도, 일조량 몇 프로가 되어야 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봄은, 봄이 왔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다. 

   봄이 되면 특히 활기를 띠는 곳은 고물시장이다. 왠지 모르게 낡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봄의 마술인가보다. 여전히 파카차림에 목도리를 두르고도 표정만은 한층 여유로워진 사람들이 고물시장으로 모여든다. 

   솔직히 고물시장이라고 해서 다 같은 고물시장은 아니다. 버려지기 일보직전의 물건들이 모여 있는 그야말로 쓰레기 시장부터 앤틱 가구와 골동품이 즐비한 보물시장까지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동네 고물시장은 베를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쓰레기 시장이다. 손님도 상인도 대부분 외국인, 그 중에서도 터키인이 가장 많다. 산보도 할 겸 터키 음식을 사먹거나 간단한 물건들을 찾으러 우리는 그 시장에 종종 들른다. 

   지난주 일요일 남편과 나는 꽤 오래간만에 그 시장을 찾았다가 적잖이 놀랐다. 상인들도 그대로고 물건들도 그대로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손님들로 꽉 차 시장 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 보였기 때문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절대로 팔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물건들이 팔려나가는 모습이었다. 흩어진 색연필이며 낡은 슬리퍼, 짝짝이 살림살이들이 내 눈 앞에서 속속 사라져갔다. 여느 때 같으면 그저 핸드폰이나 뒤적이며 무료히 앉아있었을 상인들이 그날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서서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시장은 이미 우리가 알던 그 쓰레기 시장이 아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멍청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낯선 옷차림의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을 때 얼마 전에 우리 동네에 새로운 난민보호시설이 마련되었다는 뉴스가 머릿속을 휙 훑고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얼굴을 아는 몇몇 상인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와서 이 비싼 물가에 어떻게 필요한 걸 다 새로 살 수 있겠어. 저 사람들이 살길은 여기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망찬 얼굴이었다.

   그 뒤로 얇은 티셔츠 차림의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딸로 보이는 한 소녀가 케밥 1개를 한입씩 번갈아 가며 나누어 먹고 있었다. 반팔 블라우스에 맨발에 까만 구두를 신은 그 어린 소녀는 한 순간도 엄마 손에 들린 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왜 나는 괜히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다시 고쳐 둘렀는지 모르겠다.

   봄이 왔다. 2016년 봄은 손님을 데리고 왔다. 부디 저 손님들에게 베를린의 첫 봄이 너무 쌀쌀맞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2016년 3월 25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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