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살이10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0주 
제목: 여름을 추억하며


전거 하이킹을 나갔던 막내가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나 비오니?
   “얼마나 많이 왔는데. 엄마는 몰랐어?
   그제야 창문 밖을 보니 지나간 비바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작은 웅덩이가 파였고 미처 물방울을 털어내지 못한 나뭇가지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며칠째 25도를 웃돌며 제법 여름 흉내를 내던 날씨가 뚝뚝 떨어지는 빗물 소리와 함께 20도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고등학생 무렵, 어느 해 장맛비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모두 앗아갔다. 무언가에 놀란 듯한 엄마의 비명소리에 허겁지겁 층계를 내려갔을 때 지하는 이미 빗물에 잠겨있었다. 여기저기로 스며든 빗물에 바닥에 깔린 장판이 10센티는 족히 위로 떠올라와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 한구석에 켜켜이 누워있던 앨범들 속에서는 오랜 세월에 누렇게 변해가던 흑백 사진들이 하나 둘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양복과 지팡이가 멋지게 어울리던 할아버지 사진도 믿을 수 없이 예뻤던 교복 입은 엄마 사진도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번져버린 후였다.

   그로부터 매년 여름 지하실은 물에 잠겼다. 장마철이면 온 가족이 창문 틈마다 걸레를 끼워 넣고 바닥에는 못쓰게 되어버린 이불을 깔아 빗물과 전투를 벌였다. 서너 장의 이불이 흥건히 젖으면 그 이불들을 동생들과 내가 걷어 세탁기에 넣었다. 탈수가 끝난 이불은 엄마가 다시 지하실 바닥에 깔아 놓았다. 어떤 날은 밤새도록 내리는 비에 온 가족이 번갈아 가며 이불을 걷어내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탕물을 뒤집어쓴 막내 동생이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기다려 누나. 내가 크면 여기를 아예 수영장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시간은 쏜살같다. 그로부터 20년, 막내는 정말 커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비록 수영장은 만들지 못했지만 이제는 엄마도 동생들도 장맛비에 밤을 지새우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이곳 독일에서 오랜 시간 장마를 잊고 살고 있다. 가족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여름을 싫어했던 나는 소원대로 한 여름에도 스웨터와 목도리를 옷장에 넣어두지 못하고 20년을 살았다.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장마를 잊고 살다 보니 여름을 잊고 살았다.

   장맛비가 걷히면 우렁찬 매미 소리에 아버지의 서재가 말라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먹던 수박이며 참외는 참 꿀맛이었다. 작은 게들과 조개들이 놀던 해변이며 포근한 바다, 할머니 댁 평상 위 선풍기와 낮잠, 그리고 잠자리 또 방아깨비…… 내가 여름이라 불렀던 그 모든 것들이 장마와 무더위를 견뎌내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와 날씨변화가 심해지고 있는 요즘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20년이 흐른 후에 우리는 무엇을 추억하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게 될 그 무엇인가는 우리가 이미 잃은 것 일거라는 사실이다. 
   옷걸이에 걸린 스웨터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이제 창문을 닫아야겠다.

2016년 7월 21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노란 바람

문 밖이 노랗게 얼어 붙었다. 
노란 바람에 취한 떡갈나무 가지들이 
양팔을 휘두르며 춤을 춘다.
고개를 휘저으며 몸부림친다.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해설까. 
대지는 못 본척 고요히 숨죽였다.
고개 숙인 풀잎들만 떨고 서있다.

머지않아 지진이라도 날듯 하늘이 갈라지며 
저들에게 눈물을 퍼부을 것이다. 

- 2016년 7월 9일 여기는 베를린

베를린 살이9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9주 
제목: 마이바흐우퍼 재래시장3 (The end of the Maybachufer trilogy)

기 값이 뚝 떨어졌다. 나는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늘 구매목록에도 딸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을 한참 서성였던 이유는 어릴 적 딸기에 대한 추억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갔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는 3가지의 딸기가 있었다. 매년 처음 나오는 딸기는 알이 굵고 꼭지부분은 하얀 것이 끝으로 갈수록 빨갛게 여물어 있었다. 위풍도 당당히 줄지어 앉아있던 그 딸기가 어린 내 눈에는 참 맛있게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먹을 때가 아니라며 사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이 오실 때면 그 앞에는 어김없이 그 딸기가 포크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정신 없이 딸기를 주워 먹었다가 엄마한테 한번 혼이 난 그날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손님상에 있는 딸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더 이상은 딸기가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내 생일이 돌아올 때쯤 되면 두 번째 딸기가 한창이었다. 포장 용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수북이 쌓여 있다가 하나 둘씩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두 번째 딸기는 몸 전체가 빨간 대신 덩치는 첫 번째 딸기보다 훨씬 작았다. 매년 생일이면 엄마는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며 접시마다 딸기를 곁들여 생일상을 차려 주셨다. 실컷 먹으라며 내 앞으로 딸기 접시를 옮겨 주셨다. 

   시장에서 딸기가 거의 사라져갈 때쯤이면 아저씨들이 딸기 수레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두 번째 딸기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에 부대낀 얼굴이 짓물러 터져있던, 천 원만 내도 보따리 가득 주는데도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던 그 딸기를 이모는 항상 몇 보따리씩 사셨다. 그리고 깨끗이 씻어 며칠을 끓여서 딸기잼을 만들어 주셨다. 식빵 위에서 곱게도 빛나던 그 딸기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더 맛있는 잼을 먹어 본 적도 없다.

   베를린에는 지금 딸기 철의 제2막이 올랐다. 한국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딸기야말로 어린 나에게 일찌감치 비논리를 보여주며 논리를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이었다. 덕분에 납작한 복숭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금”키위라는 것이 나왔을 때도 나는 하루 빨리 그 맛을 보려는 사람들 틈에 끼어 고생하지 않고 얌전히 때를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가지고 있어 가지고 싶지 않고 가질 수 없어 가지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은 업보일까? 
   스산한 독일 날씨에 불쌍히 떨고 있는 용과나 파파야 등의 열대 과일이나 새로운 농업기술발전의 산물 앞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열매는 그냥 아프리카에서 먹으면 안 되나? 저 맛없는 파파야가 파파야나무 밑에서는 얼마나 귀하고도 맛난 열매일까? 욕심, 문득 이 단어가 떠오른다. 한곳에 앉아 온 세상을 만질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이 시대의 희망도 어쩌면 우리들의 허황된 욕심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저쪽에 마지막 가게가 보인다. 하얀 옥양목과 빨간 산딸기, 같이 있어 좋을 것 하나 없는 딱 두 가지를 파는 괴짜 아저씨가 주인이다. 저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나면 집으로 가는 길이 눈앞에 놓여있다. 결국 사려던 오렌지와 망고는 포기해야겠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머나! 아저씨 오늘은 오렌지네요!”

2016년 7월7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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