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살이18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8주 
제목: 트럼프 현상이 주는 교훈

요일 늦은 오후,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불붙어 버린 아이들의 열띤 토론에는 그날 스페인어 시간의 흥분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날은 중요한 스페인어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3년을 배워오고 있지만 통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과목이다. 성적이 형편없는데도 시험공부조차 하기 싫은 과목, 스페인어는 17살 우리 쌍둥이들에게 그런 과목이다.
   이렇듯 하품 나던 스페인어 시간이 그날은 달랐다고 했다. 수업 전 모두들 조용히 단어장을 뒤적이고 있는데 법석을 떨며 등장한 한 아이가 있었다.
   “너희들 알아? 트럼프가 대통령 됐대. 미국 사람들 다 미친 거 아냐? 
이렇게 시작된 토론은 선생님께서 오실 때까지 커져만 갔던 모양이다.
   „토미 말이 맞아. 미친 거야. 이거야 말로 미국 판 브렉시트지.“
   „야 닐스! 그래도 전 국민이 미쳤다는 건 좀 심하잖아.“
   „트럼프가 메르켈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알기나 해? 이민자에 대해선 또 어떻고? 그러는 트럼프의 할아버지도 독일인 이민자였다며?
   당연히 처음에는 선생님도 토론의 열기를 잠시 누그러뜨려 보려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자 가만히 기다리시던 선생님께서 돌연 이런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너희들 그렇게 할 말이 많아? 좋아. 그러면 실컷 해봐. 단 독일어는 사용 금지야!
하시면서 칠판으로 돌아선 선생님께서는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1. 트럼프 현상은 더 큰 변화의 전초전일까?
    2.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3. 트럼프의 당선이 시사하는 정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토론의 주제는 이 세 가지야. 스페인어로는 어떤 질문을 해도 좋아. 자기의 생각을 알아듣게 발표한 모든 사람에게 1점(최고점)을 주겠어.“

   기적은 그 다음부터라고 했다. 평소와는 달리 아이들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손을 드는 바람에 우리 아이들도 열심히 사전을 뒤적여가며 토론에 참여했고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1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집에 와서 까지도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막내는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입장인 반면 첫째는 트럼프가 어마어마한 자산가인 점을 들며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을 밀어붙이기에 힐러리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자 신문에 비친 그 주간 다른 학교들의 모습도 마치 같은 연극인양 흡사하다. 선생님들은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멈출 수 없었던 상황을 묘사하며 학생들이 „쇼크에 빠진듯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잇달아 다수의 상식은 무너지고 기계들의 예언이 적중하는 게임 속 세상처럼 변해가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꿈은 어떻게 변해 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2016년 11월24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17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17
주 제목: 크리스털의 밤

19세기후반에 등장한 <인종 불평등론>과<19세기의 기반>에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와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은 인류를 „높고 „낮은 인종으로 구분하고 특정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백색인종으로 둔갑한 아리아 인의 우월함은 이후 국가사회주의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만행까지 이 책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케케묵은 고서에서 발췌한 궤변의 일부에 나르시시즘을 입혀 진리로 둔갑시키고 그것으로 권력의 칼을 갈아 휘두른 히틀러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사상, 나치즘이야 말로 추악한 이단(異端)의 전형이다.

   1938년 11월 7일, 17세의 폴란드계 유대인 청년 헤어쉘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은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 (Ernst Eduard vom Rath)를 암살한다. 외교적으로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리아인임은 분명했던 라트가 결국 사망하게 되는 이 사건은 나치들에게 아주 좋은 선동의 기회가 된다.

   „우리 독일 민족이 이 일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직도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우리의 상권을 점령하고 삶을 누리며 독일인에게 집세를 받아 챙기고 있는 와중에 밖에서는 같은 족속의 인간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독일 외교관을 쏘아 쓰러뜨렸다. […]

   결국 이 사건은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 사이에 벌어진 11월 포그롬, 일명 „크리스털의 밤을 촉발시킨다. 폭력과 방화로 1400채가 넘는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타고 집과 상점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여자들이 농락당하고 남자들이 고문에 쓰러지는 가운데 그 기간에만 4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고 이후 3만 명이 강제 수용되게 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1938년 11월 9일 오전, 독일 만하임에서 한 소년이 목격한 장면이다.
   “산산이 부서진 식료품 가게의 유리창으로 사람들이 통조림 깡통들을 밖으로 나르고 있었다. 2-3층쯤 되는 곳에서 피아노 한대가 떨어져 부서지더니 다른 창문으로는 라디오가 날아와 처박혔다. 차도며 보도며 온통 부서진 유리와 도자기 조각들로 뒤덮였다. 창문유리만이 아니다. 한 구석에 베이클라이트로 만들어진 빗이 떨어져 있었다. 값비싼 물건이었다. 내가 그것을 주우려 하자 엄마는 내 손을 탁 치며 나를 잡아끌었다.”

   거리를 뒤덮은 유리 파편들이 가로등불 밑에서 빛나던 밤 „크리스털의 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이름마저 조소에 찬 크리스털의 밤, 이 날의 참상은 과연 유대인들만의 비극이었을까? 
   소방관들은 지옥으로 변해가는 도시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유대인을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소리치며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 해야만 했다. 유대인을 위해서는 사망진단서를 발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 날을 회상하며 아픔에 눈물짓는 것은 정부가 아니다. 소방관이며, 의사들이며, 노인이 된 어린 소년 소녀들이다. 

2016년 11월10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TinkersToday

The sequel of the TinkersTinkle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