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riting that really paid off

I  am a guitarrist.
A guitar is an instrument for me with which I can express myself better than anything.

When I was 12 years old, I got a guitar from my brother. Out of sheer curiosity, I started to play the guitar. At that time, of course, I never thought that the rest of my childhood would be accompanied by it. One day in July 1994, I stood on the edge of the platform with a beautiful Spanish masterpiece "Antonio Marin Montero" on my back, the last present from my father, at Berlin Zoologischer garten. At the latest at that time, I knew what I wanted to be all my life. "A guitarrist"

Fortunately, I met a great teacher in Berlin. Prof. Wilczok was truly of great support for all but I'd like to say a very special thank you to her for showing me the direction of my study. From the freshman year, she gave me various pieces of J. S. Bach that are composed originally for lute and triggered my interest in the ancestor of our instrument;Lute. Not knowing what I did, I was stepping into the world of early music.

This was the moment when my vinyl record collection was expanded exponentially. Because it was the best and the most affordable way for me to listen to early music - thank goodness - even back then, there were plenty of second-hand record shops in Berlin. It was also a small box on the ground of an antiquarian bookshop where I found this record; "Das Schaffen Johann Sebastian Bachs serie H of Walter Gerwig" from Archiv.

Looking back, as a young student, fresh from Asia, filled with curiosity towards European culture, it might be pretty natural to have a strong desire to find something as soon as possible. Walter Gerwig had rapidly become my favorite lutenist and soon after my favorite instrumentalist. It had been my daily routine for a long time to imitate his articulations, to analyse his interpretations, to hear him playing for hours a day until my humble audio system made terrible noises.

The cartridge was broken. So I bought a little bit more expensive one. But when the second one exhausted in the same way, I decided to send it for repair. That was, however, a dangerous decision for which I paid dearly. After having paid more than for a new cartridge, I could finally mount it on my headshell again. Nevertheless, the tragedy was far from over. I simply couldn't be satisfied with the sound it made. It was clearly a new, but a bizarre sound which made me feel more uncomfortable day after day. The more my dissatisfaction grew, the greater became my desire to open up the cartridge and look inside.
----------> Philosophy



Biography
A s I eventually opened up the cartridge case, a fascinating scenery of microcosmos appeared before my very eyes. Especially, the view of the tiny magnet and the tinier diamond stunned me because I was then, at the very least, familiar with the fact that the interplay between them is where the music results from. Guided by unrestrained curiosity, I had bought 12 microscopes and hundreds of broken cartridges before I successfully managed to build a "sounding" cartridge. Even though it had taken me more than a decade by then, my earliest fascination hadn't ever faded away.

However, it was far enough away from my goal. As the short-lived joy of success slipped away, I quickly realised that I was not at the final destination, but at the point of departure because making sound is necessary but not sufficient to being a cartridge. A cartridge, I thought, was supposed to make "beautiful sounds". So I had spent the subsequent decade seeking materials and techniques for beautiful sounds.

One day, after I had completed with two modifications for the generator of my cartridge, I was listening to music quite happily. I was happy because the sound of the prototype seemed to be upgraded with the modifications I had made. I had changed a mere elastomer and had added some more turns of wire within the coil. But to be a bit more honest, it were actually small but not minor modifications, which is why I was even more excited about the outcome. A while after, I asked my wife how it sounded to her. My wife, who had studied music with me, said without any hesitation "It sounds just like you!"

What is a beautiful sound? There are some well-known criteria to meet to be a high-quality cartridge. Transparency for example? or balance? I appreciate those aspects. However, "If a cartridge could meet the highest standards of all aspects, is it a perfect cartridge?" If I were asked this question, I'd rather say "No" First of all, a cartridge can never make sound alone. Furthermore, after all is said and done, why we need a cartridge is to listen to music. I think, the only things able to listen to MUSIC are our ears. Since it always has been my ears that are in command of my work, I know how fully they are aware of their preferences and whether a sound was beautiful or not? They decide.

As I mentioned in my biography, I have been longer a musician than a cartridge maker so far. I don't know whether the fact is fully answerable for my current reflection but in recent times, I often think that the ideal Tedeska cartridge that I am aiming for might be like a guitar that I am dreaming of. Even masterpieces, for example guitars by Antonio de Torres or Rene Lacote, don't sound masterful in all circumstances. They need a right musician, a right composition, even a right audience perhaps. But when the moment is right, they unfold their full potential and leave us completely paralyzed. It would be a great honor if I could share such experiences with my customer.

Appendix
The pearl eye on the Tedeska cartridge has no function. It serves as a pure adornment like the one on the frog of a violin bow. But if you insist on having a function, I would quote an old lesson from the lutherie school "Place your right thumb on the frog, it will not be long before a melody sounds"


Thanks for reading - TEDESKA

Editorial supervision: Michael HS Lee, Gabriel HS Lee
written by J. Francesca Lee

베를린 살이29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9
주 제목: 만남

"람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동물적인 나이가 있을 뿐 인간으로서의 정신 연령은 부재다.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서만 인간은 성장하고 또 형성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만남에 의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법정 스님의 „영혼의 모음“중에서 „만남“ 이란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인생의 만남은 유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낯선 언어, 낯선 가치, 심지어 낯선 냄새까지, 쉴 새 없이 새로운 무언가와 부딪치며 살아가던 날에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해가며 방황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그 모든 만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낯설기만 했던 타국이 제2의 고향이 된 지금까지도 미처 만나지 못한 것들은 수 없이 많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그렇기 때문에 광장 한편에 있는 카우프호프 백화점 앞 둥그런 시계 밑은 종종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된다. 그날 나는 남편이 선물해준 일본산 수첩에 끼울 속지를 사러 그곳에 갔었다. 독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 겨우 찾아낸 곳이 그 근처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종이가게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종이와 필기구만 파는 가게였다. 너무 낯설어 몇 번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나가려는데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가방에서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보이며 속지 한 권 달라고 하자 그 사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금세 어디선가 속지 한 무더기를 들고 와 각각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필로 쓸 것인지 만년필로 쓸 것인지, 쓸 것인지 그릴 것인지, 상상도 못해본 질문들이 쏟아졌다. 조금 있자니 손님인 듯 보이는 남자가 같은 수첩을 내보이며 이야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 종이는 이렇고 저 종이는 저렇고 하며 경험담을 늘어놓자 한 여자는 또 필기구와 잉크에 대해 긴 설명을 보탰다. 그들의 수첩은 웬만한 미술관 하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캘리그라피와 그림들로 가득했다. 살면서 수만 번 „종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한 번도 상상한적 없는 종이들의 세상이었다. 

   그날 카우프호프 백화점 5층 카페로 돌아온 나는 새로 산 속지에 이런 일기를 썼다.
   „창문 밖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노란 기차가 사람들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긴 놈, 짧은 놈, 그것들이 지나간 기찻길은 어느새 사람들로 메워진다. 3 4 5 6 7 8 9 10 11 12 저 둥그런 것은 대체 무얼까? 20년을 살고서도 난 저 물건의 이름조차 모른다. 보이는 것은 왜 보이는 것일까? 만나는 것은 왜 만나는 것일까? 보고도 못 만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올해는 남편 덕에 이 멋진 수첩을 만났다. 만나고 나니 만난 이들을 만난다. 만나기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이다.

   법정스님의 „만남은 우리의 일상 속 작은 만남의 이유뿐만 아니라 소중함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오늘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내 인생 또 하나의 소중한 만남이었던 서울&의 베를린살이를 맺는다. 

2017년 5월 11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8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8
주 제목: 오스터하제와 오스터아이

를린에는 요즈음 부활절 방학이 한창이다. 부활절은 크리스트교의 축일이지만 베를린에서는 법정공휴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종교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부활절을 쇤다. 특히 1월 말에서 2월 초에 걸쳐 약 일주일간의 짧은 겨울방학을 보낸 학생들에게는 두 달여 만에 또 한 번의 방학이 찾아오는 셈이다.

   부활절은 날짜가 해마다 바뀐다. 매년 3월 21일 이후 첫 번째 뜨는 보름달을 기준으로 바로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Ostersonntag(오스터존탁)이라고 해서 축일로 정하기 때문이다. 오스터존탁은 부활의 일요일이라는 뜻이다. 이 날이 바로 장사한지 삼 일째 되는 날이자 예수가 부활하신 날이 된다. 
   이로부터 나흘 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눈다. 이 날을 성스러운 목요일 이라는 뜻으로 Gründonnerstag(그륀도너스탁) 이라고 부르며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가린 채 종소리와 오르간연주가 없는 조용한 미사를 드린다. 반면, 관공서와 슈퍼는 몰려든 사람들로 골머리를 앓는 날이기도 하다. 바로 다음 날부터 공휴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음 날인 Karfreitag(카프라이탁)은 „비통한 금요일이다. 이 날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힌 날로 크리스트교인들 에게는 일 년 중 가장 슬픈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활절이란 기쁘기 그지없는 축제 속에 섞인 이 비통하기 그지없는 금요일덕분에 부활절은 „고요한 축제라고 불린다. 이 날에는 거의 모든 관공서나 상점들이 문을 닫을 뿐 아니라 무도회나 댄스파티, 춤이 섞인 공연이 금지된다.

   토요일에는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연다. 그리고 다음 날인 부활절, 그 다음 날인 „Ostermonntag(오스터몬탁)“까지가 공휴일이다. 오스터몬탁은 예수의 두 제자가 엠마우스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날로 그 기쁜 소식을 여기 저기 전하며 함께 나누는 날이라고 한다. 부활절 기간 동안 사람들은 만났다가 헤어질 때 „Frohe Ostern(프로에오스턴)“ 이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즐거운 부활절이라는 뜻이다. 

   즐겁기만 한 부활절은 단연 어린이들 차지다. 집집마다 오스터하제라고 불리는 토끼가 숨겨놓았다는 오스터아이라는 달걀을 찾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일 년에 한번 토끼가 바구니에 달걀을 가득 담아와 여기저기 숨겨놓는다는 허술한 시나리오에 반해 어른들이 숨겨놓은 오색찬란한 달걀모양의 초콜릿을 찾아 흙투성이가 되어 정원을 누비는 아이들의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애절하다. 운이 좋으면 가끔 오스터하제도 만날 수 있다. 발견되는 즉시 초콜릿으로 변해버린다는 금빛토끼 한 마리를 손에 넣고 환하게 피어나는 아이들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수선화 같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마음으로 부활절을 쇠는 사람이든 덩달아 쇠는 사람이든 말이다. 그 어떤 설교보다도 감동적인 이 미소야말로 부활절의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독일에서 부활절은 종교를 넘어 문화로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2017년 4월 20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7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7 
주 제목: Frühlingsgrüße aus Berlin (베를린에서 보내는 봄소식)

  은 패딩 파카차림에 목이 긴 양말을 단정히 올려 신고 학교로 향하는 큰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작은 아이가 반팔 티셔츠 바람으로 터덜터덜 층계를 내려온다. 요 며칠 오후에 집에 오면서 외투를 벗어 가방에 쑤셔 넣고 오더니 이제 아예 외투 따위 필요 없다는 심산이다. 아무리 그래도 반팔은 아직 너무 춥지 않느냐고 했더니 날보고 도리어 엄마는 밖에 나가 보지도 않느냐고 면박을 준다. 그래. 4월이다. 날씨도 어차피 제 맘대로니 너도 네 멋대로 살아라 하며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닫았다.

   베를린의 4월 날씨는 여름에서 늦가을을 넘나든다. 지금 날씨가 이렇다 해서 한 시간 후에도 이러리란 보장은 없다. 하늘이 실성한 듯 변덕을 부려야 아 봄이구나 싶을 정도다. 지금쯤 서둘러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목도리를 눈 밑까지 올려 두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팔에 반바지 차림도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변덕스런 날씨만큼이나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호들갑도 어떤 때는 참 부질없어 보인다. 어떤 이는 죽저사저 현재를 살고 어떤 이는 또 죽어라고 미래를 산다. 그래 봤자 옳은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집 창문 앞에는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웬만큼 고개를 젖혀서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가 커서 내가 일본어로 키다리란 뜻의 노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노뽀는 벌써 몇 달 전 작은 봉우리들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그 작은 봉우리들을 발견했던 날에는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어린 생명에 눈이 쌓이는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혼자 저 나무가 미쳤나 하고 중얼거렸다. 오늘 보니 어느새 노뽀의 봉우리들은 싹을 틔워 잎사귀들을 한껏 펼치고 그것도 모자라 이곳저곳에서 푸른 가지들을 사방으로 뻗어내고 있다. 영락없는 봄날의 한 그루 행복한 나무의 자태다. 이제야 노뽀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는 시간이 있나 보다. 아침에 춥고 오후에 더워도 꿋꿋이 봄을 그리고 서있는 노뽀가 오늘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동네 꽃가게에서도 화분들을 밖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단연 Stiefmütterchen이 사람들의 발끝 가장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Stiefmütterchen“은 한국말로 계모, 즉 새엄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큰 꽃잎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돌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 해서 „새엄마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Männertreu“라는 꽃 이름도 재미있다. 한국말로 의역해서 „남자의 사랑 정도의 뜻이 된다. Lobelia erinus라는 학명을 가진 이 꽃은 한 여름 불타고 꺼져버리는 남자들의 사랑처럼 6월부터 7월까지만 잠시 피었다가 져버리는 바람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문득 지금쯤 한국에 만발했을 벚꽃이 그립다. 차가운 암흑 속에서 3년을, 찬바람 부는 광장에서 한 겨울을 보낸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도 이제는 좀 여유로운 봄날이 찾아 왔으면 좋겠다. 하물며 여기 베를린에도 봄이 왔는데......

2017년 4월 6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6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6주 
제목: 정착, 그 소리 없는 투쟁

늘 아침에도 나는 히잡을 쓴 두 명의 여성과 함께 피트니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동네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여성 전용 피트니스센터다. 운동을 마치고 사우나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는 불구르샐러드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불구르는 아랍음식에 자주 등장하는 가공된 밀의 일종이다. 몇 사람은 불구르샐러드에 볶은 야채를 넣는다는 반면 다른 몇몇은 야채는 날것으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수는 아마 터키인일 것이다. 게다가 공중목욕탕이 없는 독일에서 여성 전용 피트니스란 터키 여자 목욕탕이나 다름이 없다. 사우나 안에서 터키 수다를 듣고 앉아있는 것은 사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여자들은 독일어로 떠들고 있었다. 물론 청취자를 배려해서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모국어로 서로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좀 더 듣다 보니 한 그룹은 터키인, 다른 한 그룹은 시리아인 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터키 아주머니가 시리아 아주머니의 서툰 독일어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가며 독일에 온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에둘러 물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1년 반, 2년 정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불현듯 재작년 겨울, 눈을 맞으며 난민보호소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베를린에는 여전히 곳곳에 난민보호시설이 남아있다. 신문이나 뉴스에는 아직도 심심찮게 본국으로 송환되는 난민들의 사연이 실리곤 한다. 반면, 사회에 정착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드물다. 정착도 어찌 보면 송환에 못지않은 투쟁인데 말이다.

   오랜 만에 남편과 함께 터키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걷다 보면 아랍인지 독일인지 헛갈릴 정도로 아랍 상권이 밀집해 있는 길 하나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그 길을 걸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망하고 끊임없이 생기는구나.“ 
   거리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간판들로 가득했다. 알 수 없는 아랍어로 멋스럽게 새겨진 상호 위에는 희망이 하나씩 걸려있었다.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뜨이는 이상한 제과점이 있었다. 바클라바, 카다이프등 호두와 피스타치오, 꿀로 만든 아랍 식 과자를 파는 곳임은 분명한데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제과점 한 쪽 벽에서는 큰 모니터에 아랍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인 듯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다. 하얀 건물들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어느 도시의 일상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남편이 팔을 툭툭 치는 바람에 비로소 과자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순간, 나는 그 이상한 제과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모니터 한 구석에 알파벳으로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마스쿠스 그리고 우연히 한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쭉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미소 속에서 나는 이런 말을 읽었다. 
   „그래요. 시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죠. 저곳이 싫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 예요.“
   과자 속에는 장미향이 가득했다. 지금껏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바클라바의 맛이었다. 

2017년 3월 23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5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5
주 제목: 대통령의 임무



를린 시내에는 꽤 많은 성 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샬로텐부르크성, 쾨페니크성, 치타델레등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성들이다. 이런 성들은 건축물 자체의 위풍만으로도 도시의 품격을 높이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이들의 대부분이 박물관이나 공연장 등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어 시민들의 삶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벨레뷔성의 성문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 문 앞은 항상 경호원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성의 성주가 조금 특별한 분인 탓이다.

   지난달 12일에는 벨레뷔의 새로운 성주가 당선 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 제16대 대통령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다. 벨레뷔성은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의 청와대와 같은 곳인 셈이다. 실제로 독일의 제 7대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부인과 함께 벨레뷔성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집무실과 외빈 접견 등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가끔 메르켈 총리를 독일의 대통령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독일에는 엄연히 대통령이 따로 있다. 독일의 대통령은 한 나라의 수장, 즉 서열 1위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대통령과 같지만 그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참고로 독일의 총리는 대통령과 연방의회의장 다음으로 서열 3위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실제로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총리가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통치체계가 다른 여러 나라가 모인 국제무대에서는 상징적인 개념의 „대통령처럼 보일 뿐이다. 

   독일 학생들을 위한 정치교재를 보면 대통령과 총리의 차이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독일연방대통령은 40세 이상의 독일인으로 5년간 독일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독일연방총리는 18세 이상의 독일인으로 4년간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독일을 대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독일의 대통령은 국빈을 맞이하고 개헌이나 국가 간 협정 및 조약 체결 시에 최종 승인하며 총리를 추천하고 임명 또는 해임하며 총리가 추천한 장관들을 임명 또는 해임한다. 이처럼 독일에서 대통령의 역할은 실제로 매우 한정되어 있고 자연히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도 총리보다 낮은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연방제하에서 대통령의 역할을 비하하며    그 값비싼 직위를 없애고 대신 서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주장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 대통령의 가장 큰 임무를 망각한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그 임무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국민들과 소통하며 국민적 화합을 꾀한다.“ 
   당근과 채찍이 말을 달리게 하듯 통치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회의 갖가지 개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 또한 통치자의 큰 임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총리가 채찍을 가졌다면 독일의 대통령은 당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일이야말로 대통령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2017년 3월 9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4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4
주 제목: 시끄러워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영화축제 (제 67회 베를리날레)

화에는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나에게 베를린영화제는 이런 것이었다. 베를린 한 복판 동물원 역에 있는 Zoo Plast(초팔라스트)라는 역사 깊은 영화관 앞에 빨간 카펫이 깔리면 5분도 안 되는 학교 길을 20분도 넘게 돌아다녀야 했다. 곳곳에 길이 막히고 교통 통제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줄지어 서있었지만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항상 기대와 흥분이 묻어있었다. 그 분위기에 휩싸여 나도 몰려든 군중 뒤를 빙 돌아 학교로 향하곤 했다. 가끔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의 누군가가 플래시세례를 받는 모습이 보이면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려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던 모양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들의 모습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큰 경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한듯하다. 모자와 넥타이, 어떤 때는 지팡이까지 갖추고 영화관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과 얼굴들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유럽문화라는 단어와 단단히 묶여있다.

   그러나 세월이 꽤 흘러 내가 다시 베를린 영화제를 찾은 이유는 그때의 향수 때문도 어떤 영화 때문도 아니었다. 영화제가 시작된 후 얼마 안돼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눈에 띄는 실망과 비판 섞인 신문기사를 읽다 못해서 무작정 사진기를 들고 집을 나섰던 것뿐이었다. 어제 신문에는 그 비판이 극에 달했다. 남우주연상을 탄 배우가 수상소감을 밝히기 전에 씹던 껌을 트로피에 붙여 놓았다지 않나, 감독상을 탄 사람은 트로피를 받으러 나오지도 않았다지 않나, 2017년,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었다. 

   영화관들은 텅 비어 있었다. 상영관과 시각을 안내하는 전광판에는 좌석이 비어있음을 알리는 초록색 불이 여기저기 들어와 있었다. 아무리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이라고는 해도 경쟁부문의 모든 참가작들이 상영되는 일반 관람객들의 천국과 같은 날에 그런 쓸쓸함이 감돌 줄은 몰랐다. 눈앞으로 이십 년 전 초팔라스트 영화관 앞의 모습이 오래된 필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때에 비하니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곳곳에 최첨단 기술을 완비한 영화관들이 생겨 더 이상은 길을 막고 빨간 카펫을 깔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 대신 관람객들이 영화관에서 영화관으로 다니느라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어쨌든 올해 베를린영화제를 보는 시선은 차갑다. 혹자는 세계 정치에 혹자는 베를린에서 났던 테러에 또는 출품작들의 작품성에, 주최 측의 역량부족에 각각 책임을 돌린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관들을 다녀온 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기사가 하나 있다. 베를린영화제가 „건강하게 살을 뺄 필요가 있다는 슈피겔(Spiegel)지 속 한 사설이다. 무명 영화들을 배척하고 유명인들을 섭외해놓고 환영사까지 정치색으로 물들여가며 얻은 결과가 시상식의 그런 추태라고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고려해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명하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듯 거대하다고 해서 모두 위대한 것도 아니다. 

2017년 2월 23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3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3주 
제목: 프랑크와 비엔나


모양이 같다고 해서 섣불리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독일의 유명한 음식 월간지 팔스타프(falstaff)속 한 구절이다.

   독일 하면 대뜸 맥주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소시지를 빼놓고 맥주의 명성만을 논할 수는 없다. 1500종 이상의 소시지를 보유한 독일은 소시지의 파라다이스라 불린다. 그 중에서도 프랑크푸르터(Frankfurter)와 비너(Wiener)는 가장 대표적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프랑크와 비엔나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학생들의 도시락반찬으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생김새도 맛도 비슷한 두 종류의 소시지가 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독일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소시지나 치즈 등의 이름과 명패에 적힌 지명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류가 너무 많아서 모양만 보고는 사려는 것을 골라내기가 힘들고 둘째로는, 지방마다 고유의 풍미가 있어서 지명만 보아도 맛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간의 차이는 더욱더 확연하다. 스페인, 이태리, 스위스, 폴란드, 어떤 나라 이름이 눈에 띄느냐에 따라 색다른 군침이 돌 정도다.
   이런 맛의 차이는 그 나라의 지형이나 기후 등과 물론 관계가 깊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맛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805년, 일찍부터 소시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육 가공기술을 연마한 요한 게오르그 라너(Johahn Georg Lahner)는 비엔나로 건너가 가게를 열었는데 직접 만든 소시지에 오리지날 비엔나 프랑크푸르터 소시지(Original Wiener Frankfurter Würstel)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이름이 참 재미있다. 자신의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부각시키면서도 비엔나에서는 자기가 1인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라너의 소시지 속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쇠고기와 돼지고기가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엄격한 전통을 지켜오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용납되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라너의 시도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소시지는 점점 유명해져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소시지에 이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겉모양으로는 내용물을 분간하기 힘든 특성을 이용해 심지어는 말고기를 넣은 소시지까지 같은 이름을 달게 되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929년 프랑크푸르터라는 이름을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시지가 우리도 잘 아는 프랑크소시지다. 
   오늘날 프랑크푸르터라는 이름은 특별한 기준에 따라 생산된 소시지에만 붙일 수 있고 그 외의 가느다란 종류는 비너라 부른다. 프랑크푸르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산된 돼지고기로 만들어야 하며 양의 창자를 사용한다. 양념이나 훈연기술도 지정된 방법만 허용된다고 한다. 우리 같은 소비자에게 프랑크푸르터와 비너를 분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프랑크푸르터는 항상 두 개씩 묶여있다. 

   이에 더해 아래와 같은 충고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다. 
   “두 개씩 묶여 있다고 해서 길이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2017년 2월 9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2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2주 
제목: 모른다, 모른다, 나는 맹세코 저 사람을 모른다

는 체하기보다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자고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며 살아왔는데 요즘처럼 모른다는 말이 싫어지기는 내 평생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부터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가 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Erbarme dich로 시작되는 아리아다. 아마도 얼마 전 트럭테러가 났던 크리스마스 시장에 다녀온 이후부터인 것 같다. 그 시장 중심에 서 있는 카이저빌헬름기념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는 수년 전 부활절에 이 곡을 처음 라이브로 들었던 곳이다. 그 날의 감동은 도무지 바랠 줄을 모르고 나를 따라 나이를 먹어간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작품번호 244번(BWV244)은 부활절 단골 레퍼토리다.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스스로 당하게 될 수난을 예언하는 장면에서부터 무덤에 묻히는 장면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다는„Erbarme dich라는 노래는 알토 아리아로 현대에는 주로 여성이 부르지만 실은 베드로의 노래다. 베드로가 이 슬픈 노래를 부르게 된 이유는 그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바흐는 당시의 상황을 마태수난곡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끌려가는 예수를 따라온) 베드로가 성 뜰에 앉아 있는데 한 하녀가 다가와 당신도 갈릴래아에서 온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소? 라고 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라며 첫 번째 거짓말을 한다. (당황한 베드로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는데) 성문 앞까지 가자 다른 하녀 한 명이 그를 보고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이 사람도 나사렛에서 온 예수와 함께 있었소!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을 모르오.“ 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말한다. (이 부분은 합창으로 표현되어있다) „과연 너도 그들 중에 하나다. 네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맹세코 저 인간을 모른단 말이오.“ 라면서 저주하듯 펄펄 뛰며 세 번째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잠시 후 어디선가 닭이 운다. 그 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 할 것이다는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고 뛰쳐나가 통곡하기 시작한다.

   바이올린 한 대가 조용히 일어나 „Erbarme dich의 전주를 시작하는 곳이다. 이어지는 노래의 가사는 이런 뜻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 눈물을 보소서. 나의 마음과 눈이 당신 앞에서 통곡하나이다.”
   언젠가 한번쯤은 거짓말쟁이였던 우리들 중에 베드로의 눈물 앞에 덤덤히 앉아있을 자가 있을까? 가사는 몇 마디 되지 않는데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손발이 저려온다. 

   중간에 나오는 합창부분에서도 바흐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지고 있다. „네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네 말만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거짓말을 하는 자 너, 너만이 그 사실을 모른다.
   „Erbarme dich는 „에어바메디히로 발음되며 용서나 자비, 동정을 구할 때 쓰는 말이다. 유튜브 등에서 들을 수 있다.

2017년 1월 19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1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1
주 제목: 베를린 곰처럼 일어나다

를린 살이 20여 년 중에 2016년처럼 유럽 공동체란 말이 실감나던 해는 없었다. 2016년 3월 23일 브뤼셀 테러가 있던 다음날에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 까맣고 노랗고 빨간빛이 비추었다. 벨기에 국기였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 파리광장(Pariser Platz)은 그 불빛 속에서 작은 벨기에가 되어 추모 객을 맞았다. 꽃과 양초를 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희생자들을 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파리의 에펠탑에도 벨기에의 삼색기가 빛으로 드리워졌다.

   그로부터 몇 달 후 7월에는 프랑스 니스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여름휴가와 축제를 즐기고 있던 유럽은 또 한 번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그날의 에펠탑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냘파 보였다. 자국의 3색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간신히 서있는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상복을 입은 여인네 같았다. 베를린 속 파리광장도 역시 파랗고 하얗고 빨간 슬픔에 잠겼다. 그날은 유독 많은 사람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을 응시하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쩌면 그들을 보고 있는 내 눈동자 속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저곳에 독일 국기가 비추일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2016년 12월 20일, 브란덴부르크 문은 결국 까맣고 빨갛고 누런빛에 휩싸였다. 테러리스트 아니스 암리가 탄 검은 트럭이 베를린의 평화로운 크리스마스시장에 난입해 12명의 무고한 목숨을 짓밟고 지나간 다음날이었다.
   테러가 훑고 간 자리는 상상했던 대로 처참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상했던 대로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동안 상상만 했던 테러 당한 도시의 참담함과 베를린의 실제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총리 메르켈의 움직임은 민첩했고 시민을 향한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의연했다. 물론 기다렸다는 듯 정치적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로 인해 곳곳에서 거센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다수는 비판보다는 먼저 수습을 원했다. 테러 다음날 시내 크리스마스시장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그 이유는 아주 합당하고도 명백했다. 

   „우리는 내일 하루 시장들을 폐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희생자들을 위한 애도의 뜻입니다.“ 
약속대로 하루가 지나자 크리스마스시장들은 다시 문을 열었다. 테러가 일어났던 시장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복구되어 발을 맞췄다.
   „너희들은 도시를 잘못 골랐어. 베를린은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동네야. 아직도 골목골목의 양로원에는 널브러진 시체들 위를 걸어오신 어른들이 살아있지. 우리는 이미 지옥을 알아. 그까짓 트럭한대로 우리를 넘봐? 베를린을? 잘 들어. 우리는 부상자를 치료할 거고 사망자들을 묻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 하지만 절대, 오늘을 잊진 않을 거야.“

   빌트(BILD)지에 실린 한 시민의 메시지였다. 테러 이후 나는 20년을 살면서도 본적 없는 도시의 숨은 저력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베를린이 마치 한 마리 거대한 곰처럼 툭툭 털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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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5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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