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살이24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4
주 제목: 시끄러워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영화축제 (제 67회 베를리날레)

화에는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나에게 베를린영화제는 이런 것이었다. 베를린 한 복판 동물원 역에 있는 Zoo Plast(초팔라스트)라는 역사 깊은 영화관 앞에 빨간 카펫이 깔리면 5분도 안 되는 학교 길을 20분도 넘게 돌아다녀야 했다. 곳곳에 길이 막히고 교통 통제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줄지어 서있었지만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항상 기대와 흥분이 묻어있었다. 그 분위기에 휩싸여 나도 몰려든 군중 뒤를 빙 돌아 학교로 향하곤 했다. 가끔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의 누군가가 플래시세례를 받는 모습이 보이면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려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던 모양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들의 모습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큰 경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한듯하다. 모자와 넥타이, 어떤 때는 지팡이까지 갖추고 영화관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과 얼굴들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유럽문화라는 단어와 단단히 묶여있다.

   그러나 세월이 꽤 흘러 내가 다시 베를린 영화제를 찾은 이유는 그때의 향수 때문도 어떤 영화 때문도 아니었다. 영화제가 시작된 후 얼마 안돼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눈에 띄는 실망과 비판 섞인 신문기사를 읽다 못해서 무작정 사진기를 들고 집을 나섰던 것뿐이었다. 어제 신문에는 그 비판이 극에 달했다. 남우주연상을 탄 배우가 수상소감을 밝히기 전에 씹던 껌을 트로피에 붙여 놓았다지 않나, 감독상을 탄 사람은 트로피를 받으러 나오지도 않았다지 않나, 2017년,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었다. 

   영화관들은 텅 비어 있었다. 상영관과 시각을 안내하는 전광판에는 좌석이 비어있음을 알리는 초록색 불이 여기저기 들어와 있었다. 아무리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이라고는 해도 경쟁부문의 모든 참가작들이 상영되는 일반 관람객들의 천국과 같은 날에 그런 쓸쓸함이 감돌 줄은 몰랐다. 눈앞으로 이십 년 전 초팔라스트 영화관 앞의 모습이 오래된 필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때에 비하니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곳곳에 최첨단 기술을 완비한 영화관들이 생겨 더 이상은 길을 막고 빨간 카펫을 깔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 대신 관람객들이 영화관에서 영화관으로 다니느라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어쨌든 올해 베를린영화제를 보는 시선은 차갑다. 혹자는 세계 정치에 혹자는 베를린에서 났던 테러에 또는 출품작들의 작품성에, 주최 측의 역량부족에 각각 책임을 돌린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관들을 다녀온 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기사가 하나 있다. 베를린영화제가 „건강하게 살을 뺄 필요가 있다는 슈피겔(Spiegel)지 속 한 사설이다. 무명 영화들을 배척하고 유명인들을 섭외해놓고 환영사까지 정치색으로 물들여가며 얻은 결과가 시상식의 그런 추태라고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고려해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명하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듯 거대하다고 해서 모두 위대한 것도 아니다. 

2017년 2월 23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3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3주 
제목: 프랑크와 비엔나


모양이 같다고 해서 섣불리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독일의 유명한 음식 월간지 팔스타프(falstaff)속 한 구절이다.

   독일 하면 대뜸 맥주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소시지를 빼놓고 맥주의 명성만을 논할 수는 없다. 1500종 이상의 소시지를 보유한 독일은 소시지의 파라다이스라 불린다. 그 중에서도 프랑크푸르터(Frankfurter)와 비너(Wiener)는 가장 대표적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프랑크와 비엔나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학생들의 도시락반찬으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생김새도 맛도 비슷한 두 종류의 소시지가 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독일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소시지나 치즈 등의 이름과 명패에 적힌 지명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류가 너무 많아서 모양만 보고는 사려는 것을 골라내기가 힘들고 둘째로는, 지방마다 고유의 풍미가 있어서 지명만 보아도 맛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간의 차이는 더욱더 확연하다. 스페인, 이태리, 스위스, 폴란드, 어떤 나라 이름이 눈에 띄느냐에 따라 색다른 군침이 돌 정도다.
   이런 맛의 차이는 그 나라의 지형이나 기후 등과 물론 관계가 깊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맛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805년, 일찍부터 소시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육 가공기술을 연마한 요한 게오르그 라너(Johahn Georg Lahner)는 비엔나로 건너가 가게를 열었는데 직접 만든 소시지에 오리지날 비엔나 프랑크푸르터 소시지(Original Wiener Frankfurter Würstel)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이름이 참 재미있다. 자신의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부각시키면서도 비엔나에서는 자기가 1인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라너의 소시지 속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쇠고기와 돼지고기가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엄격한 전통을 지켜오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용납되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라너의 시도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소시지는 점점 유명해져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소시지에 이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겉모양으로는 내용물을 분간하기 힘든 특성을 이용해 심지어는 말고기를 넣은 소시지까지 같은 이름을 달게 되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929년 프랑크푸르터라는 이름을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시지가 우리도 잘 아는 프랑크소시지다. 
   오늘날 프랑크푸르터라는 이름은 특별한 기준에 따라 생산된 소시지에만 붙일 수 있고 그 외의 가느다란 종류는 비너라 부른다. 프랑크푸르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산된 돼지고기로 만들어야 하며 양의 창자를 사용한다. 양념이나 훈연기술도 지정된 방법만 허용된다고 한다. 우리 같은 소비자에게 프랑크푸르터와 비너를 분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프랑크푸르터는 항상 두 개씩 묶여있다. 

   이에 더해 아래와 같은 충고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다. 
   “두 개씩 묶여 있다고 해서 길이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2017년 2월 9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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