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살이26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6주 
제목: 정착, 그 소리 없는 투쟁

늘 아침에도 나는 히잡을 쓴 두 명의 여성과 함께 피트니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동네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여성 전용 피트니스센터다. 운동을 마치고 사우나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는 불구르샐러드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불구르는 아랍음식에 자주 등장하는 가공된 밀의 일종이다. 몇 사람은 불구르샐러드에 볶은 야채를 넣는다는 반면 다른 몇몇은 야채는 날것으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수는 아마 터키인일 것이다. 게다가 공중목욕탕이 없는 독일에서 여성 전용 피트니스란 터키 여자 목욕탕이나 다름이 없다. 사우나 안에서 터키 수다를 듣고 앉아있는 것은 사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여자들은 독일어로 떠들고 있었다. 물론 청취자를 배려해서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모국어로 서로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좀 더 듣다 보니 한 그룹은 터키인, 다른 한 그룹은 시리아인 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터키 아주머니가 시리아 아주머니의 서툰 독일어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가며 독일에 온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에둘러 물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1년 반, 2년 정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불현듯 재작년 겨울, 눈을 맞으며 난민보호소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베를린에는 여전히 곳곳에 난민보호시설이 남아있다. 신문이나 뉴스에는 아직도 심심찮게 본국으로 송환되는 난민들의 사연이 실리곤 한다. 반면, 사회에 정착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드물다. 정착도 어찌 보면 송환에 못지않은 투쟁인데 말이다.

   오랜 만에 남편과 함께 터키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걷다 보면 아랍인지 독일인지 헛갈릴 정도로 아랍 상권이 밀집해 있는 길 하나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그 길을 걸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망하고 끊임없이 생기는구나.“ 
   거리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간판들로 가득했다. 알 수 없는 아랍어로 멋스럽게 새겨진 상호 위에는 희망이 하나씩 걸려있었다.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뜨이는 이상한 제과점이 있었다. 바클라바, 카다이프등 호두와 피스타치오, 꿀로 만든 아랍 식 과자를 파는 곳임은 분명한데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제과점 한 쪽 벽에서는 큰 모니터에 아랍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인 듯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다. 하얀 건물들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어느 도시의 일상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남편이 팔을 툭툭 치는 바람에 비로소 과자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순간, 나는 그 이상한 제과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모니터 한 구석에 알파벳으로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마스쿠스 그리고 우연히 한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쭉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미소 속에서 나는 이런 말을 읽었다. 
   „그래요. 시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죠. 저곳이 싫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 예요.“
   과자 속에는 장미향이 가득했다. 지금껏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바클라바의 맛이었다. 

2017년 3월 23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베를린 살이25

문패: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25
주 제목: 대통령의 임무



를린 시내에는 꽤 많은 성 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샬로텐부르크성, 쾨페니크성, 치타델레등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성들이다. 이런 성들은 건축물 자체의 위풍만으로도 도시의 품격을 높이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이들의 대부분이 박물관이나 공연장 등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어 시민들의 삶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벨레뷔성의 성문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 문 앞은 항상 경호원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성의 성주가 조금 특별한 분인 탓이다.

   지난달 12일에는 벨레뷔의 새로운 성주가 당선 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 제16대 대통령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다. 벨레뷔성은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의 청와대와 같은 곳인 셈이다. 실제로 독일의 제 7대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부인과 함께 벨레뷔성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집무실과 외빈 접견 등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가끔 메르켈 총리를 독일의 대통령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독일에는 엄연히 대통령이 따로 있다. 독일의 대통령은 한 나라의 수장, 즉 서열 1위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대통령과 같지만 그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참고로 독일의 총리는 대통령과 연방의회의장 다음으로 서열 3위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실제로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총리가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통치체계가 다른 여러 나라가 모인 국제무대에서는 상징적인 개념의 „대통령처럼 보일 뿐이다. 

   독일 학생들을 위한 정치교재를 보면 대통령과 총리의 차이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독일연방대통령은 40세 이상의 독일인으로 5년간 독일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독일연방총리는 18세 이상의 독일인으로 4년간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독일을 대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독일의 대통령은 국빈을 맞이하고 개헌이나 국가 간 협정 및 조약 체결 시에 최종 승인하며 총리를 추천하고 임명 또는 해임하며 총리가 추천한 장관들을 임명 또는 해임한다. 이처럼 독일에서 대통령의 역할은 실제로 매우 한정되어 있고 자연히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도 총리보다 낮은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연방제하에서 대통령의 역할을 비하하며    그 값비싼 직위를 없애고 대신 서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주장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 대통령의 가장 큰 임무를 망각한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그 임무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국민들과 소통하며 국민적 화합을 꾀한다.“ 
   당근과 채찍이 말을 달리게 하듯 통치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회의 갖가지 개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 또한 통치자의 큰 임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총리가 채찍을 가졌다면 독일의 대통령은 당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일이야말로 대통령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2017년 3월 9일 이재인
베를린 살이는 2016년 3월 ~2017 5월까지 한겨례 서울&에 연재 된 "쌍둥이 엄마의 베를린 살이"의 미 수정 원본입니다. 블로그 게재일은 2017년 9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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